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315
한자 溯湖齋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조천길 337-11[조천리 392-3]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소호재 건립
현 소재지 소호재 -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조천길 337-11[조천리 392-3]지도보기
성격 누정
양식 목조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경주이씨 월호당파 종중
관리자 경주이씨 월호당파 종중 유사 이칠봉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조천리에 있는 경주이씨 선조를 위한 재실.

[개설]

소호재(溯湖齋)는 월호당(月湖堂) 이홍인(李弘仁)[1630~1696]이 경상남도 밀양시에 시천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청도면 조천리에 사는 후손들이 1954년 건립한 재실이다.

이홍인은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의 29세손이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셋째 아들로 밀직공파 파조가 된 이창로(李彰路)의 12세손이다. 경기도 양주 도감리에서 태어난 이홍인은 28세 때 윤휴(尹鑴)의 제자가 되었고, 승문원정자를 거쳐 1676년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격한 예송(禮訟) 논쟁으로 정국이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윤휴는 남인의 당론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의리를 좇아 목숨을 바친 선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퇴은(退隱)을 생각하였다. 한편으로는 스승에게 편지를 보내 장차 닥칠지도 모를 화를 염려하며 당쟁에서 한 발짝 물러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스승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확인하고 1679년(숙종 7) 겨울 형 이홍원(李弘原)과 함께 즉각 남행을 결정하였다. 은둔할 장소를 찾아 전라도 진도만에 중간 귀착한 뒤 망망대해를 나아가던 중 큰바람이 갑작스럽게 불어 배가 심하게 흔들려 형이 뱃전에서 떨어져 죽는 참극을 눈앞에서 보았다. 이후 밀양시 무안면 고사동을 거쳐 화봉리 탄막곡(炭幕谷)에 이르러 살 곳을 정하여 돌밭을 일구며 은둔하였다. 장차 자식의 발복을 위하여 마을 이름 ‘탄막곡’을 ‘영안동(永安洞)’으로 바꾸었다. 1690년 무렵 눈과 다리에 장애가 있는 새 아내를 얻어 연이어 이준발(李俊發)과 이준달(李俊達) 두 아들을 얻었다. 죽은 뒤 영안동 양지바른 골짜기에 묻혔다. 이홍인이 세상을 떠날 무렵 홀로 남게 될 아내와 늘그막에 얻은 두 아들에게 남긴 『경유훈(警幼訓)』은 현대의 가정 교육과 인성 교육에도 요긴한 자료이다. 손자 이만걸과 사촌 이후창[1721~1761]이 청도면 조천으로 이사하여 세거지를 별도로 이루었는데, 후손들이 입향조의 사상과 학문을 성심껏 추모하고 문중 회합을 갖기 위하여 조천리에 재실을 지었다. 재실 이름 ‘소호(溯湖)’는 이홍인의 호와 윤휴의 호를 따른 것이다. 기문은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이 1955년 늦가을에 지었다.

[위치]

소호재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조천리 392-3번지에 있다. 조천마을회관에서 남쪽 무안 화봉 방면의 당고개 쪽으로 300m쯤 가면 길가에 있다.

[현황]

소호재는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어 건물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소호재를 통하여 이홍인의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입촌 내력과 경주이씨의 지역 내 분포지를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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