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604
한자
영어음역 Hy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정성미

[정의]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남원 지역에 존재했던 특수촌락집단.

[개설]

향은 소나 부곡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특수한 하급 행정구역이었다. 일반 양민이 아닌 노비·천민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촌락 집단이다. 같은 성격의 소와 부곡을 함께 일컬어 흔히 향·소·부곡으로 불린다.

이러한 사람들이 발생한 배경으로는 국가의 발생을 들고 있다. 즉, 정복전쟁에 패배하면서 생긴 예속민 집단이 천민의 촌락 집단인 향·소·부곡으로 제도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회 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과 붕괴, 계급 분화에서 야기된 것으로 보인다.

향은 부곡과 더불어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며, 소와는 달리 호장(戶長) 등 토착 관리가 통제했다. 향의 주민들은 국학에 입학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형벌에서도 노비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

[변천]

국가의 발생 배경으로부터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향·소·부곡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지방 행정구획 단위인 부(府)가 격하되어 발생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당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역적이 있거나, 조정으로부터 중벌을 받은 자가 있으면 해당 고을을 격하시켜 향이나 부곡으로 되는 것이다.

임금과 부모 및 조부모를 죽이는 경우와 그밖에 전쟁에 의한 포로들을 일정한 장소에 정착시키는 데서도 형성되었다. 또한 군현의 사람들이 진역 및 부곡의 사람과 혼인하여 거기에서 소생한 자 또한 향과 부곡에 귀속시켰다.

고려 제31대 공민왕 4년(1355)에 전주목에서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를 가둔 것을 기화로 전주부곡으로 격하시켰다가 다시 5년 뒤에 완산부(完山府)로 격상시킨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반 죄인을 처리하는 과정에도 군·현보다 부곡이 중범인 죄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결국 향과 부곡인들을 천시하는 사회적 통념을 반영한 것이다.

전라도에 있던 향·소·부곡의 총수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210개소였다. 이 가운데 향은 50개소, 부곡은 77개소, 소는 83개소였다. 전라북도의 경우는 전라남도와 동일하게 총 105개소였다. 105개 가운데 향은 28개소, 부곡은 40개소, 소는 37개소였다. 2군 7개현을 거느린 남원부의 경우는 총 36개소였다.

고려 중기 이후 가혹한 수취로 인해 주민들의 저항이 고조되면서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전국적으로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부곡·소와 함께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직촌(直村)으로 되어 완전 소멸하였다. 향의 붕괴는 특수한 하층 지방행정 조직에서 벗어나 일반 지방행정 조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이며, 고려의 군현제에서 조선의 군현제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남원부 관할 구역의 향·소·부곡이 전라도 지방에서도 월등하게 많은 이유는 남원 지역이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생활이 안정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어느 지역보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농산물이 풍부하여, 생활필수품이나 사치품을 많이 선호하였던 것이다.

특히 남원부는 옛날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농산물 집산지였기 때문에 일찍이 물물교환지로서 상업이 매우 발달되었다. 이렇게 교환경제의 활성화에 따라 향·소에서 생산된 수공업 제품으로 관수품을 공납하고, 남은 것은 자유 처분이 가능했다. 즉, 물물교환으로 인한 생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발달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