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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할아버지의 직업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2011
한자 김종한 할아버지의 職業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집필자 이민우

직업 변화

그는 남원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정읍(구 태인면 소재)에 있는 금융조합에 처음 취직하였다. 여기에서 약 2년간 근무하였다. 그리고 스무 살 때 결혼한 후 1년 남짓 더 근무하다가 8월, 군입대 4-5개월 전에 남원 집에 와서 숨어서 살았다. 이때부터는 아내와 남원 집에서 계속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해방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남원에 농촌지도소가 처음으로 생겨서 거기에 취직하여 약 3년간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남원에서 제일 큰 도정업을 하시던 당숙께서 어느 날 집으로 와서 아버지와 어쩌고저쩌고 하시다가 나를 불러서 갔더니, 남원 세무서 시험을 보라고 하셨지요. 남원 세무서에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당숙이 남원 세무서에 협조를 해주고 있으니 집안 가족에서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추천을 하라고 해서 나보고 시험을 보라고 하신 것이었어요. 그래서 당숙한테 ‘당숙! 그런 소리하려면 앞으로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라고 했더니, 당숙께서는 ‘너를 취직시키려고 하는데 왜 그런 소릴 하느냐’고 하셨지요. 그래서 당숙한테 ‘당숙! 생각을 해보쇼. 눈깔 네 개 붙은 데는 옛날부터 상종을 안 하는 법이요. 경찰서, 세무서 등등은 사람이 도저히 다닐 데가 못되는 곳이요.’ 라면서 강하게 얘기하니까 우리 당숙이 할 말을 잊었지요. 그러면서 당숙이 ‘그러면 가서 시험이나 좀 봐주소. 못 이긴 듯이 말이야.’ 라고 해서 그것도 안 한다고 하니까, ‘내 체면도 있는데...’ 하시고, 아버지께서도 당숙 체면이나 좀 세워주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보게 되었어요.”

“약 열흘 후에 시험이 있다고 통지가 와서 시험 보러 갔더니, 몇 명이나 뽑는지는 모르겠는데 약 20명이 시험 보러 왔어요. 그 중 네 명이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 당시 문제가 「조세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여라」라는 논문 시험으로 시험 시간은 1시간이 주어졌어요. 나는 농업학교 출신이니까 무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해서 그냥 ‘세금 가지고 국가에서 계획을 하고 운영하므로 국민들이 부과된 세금을 제 날짜에 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로 답을 썼고, 구술 시험으로 일반 상식을 묻길래 대답을 했지요. 그 이튿날 발표를 했는데 사람 열 명을 뽑는데 세 사람은 정식 직원으로 뽑고 나머지 일곱 명은 임시 직원으로 뽑았는데, 내가 정식 직원으로 뽑혔어요. 당숙이 와서 애썼다고 하여, 나는 당숙 체면 때문에 가서 시험 본 것이므로 안 다닌다고 하니까 당숙은 ‘자네 알아서 하소’ 라고 했지요. 그 뒤로 안 나가니까 세무서에서 사람이 데리러 와서, 다른 데서는 이 직을 하려고 난리가 났는데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고, 등등으로 하도 부대껴서 나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때 수도세과가 처음 생겨서 지적도와 지적 장부 등을 정리하여 논에 현물로 세금을 매기는 역할을 했지요. 그 뒤에 세무과장, 서장 등이 주사 시험을 보라고 해서, 광주에 가서 시험을 봐 합격한 후 곡성에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다시 남원으로 와서 몇 년 있다가 그만 둬버렸지요.”

그는 세무서에서 주로 사무만 봐서, 남원에서 그가 세무서에 다닌 것은 각 면의 면장이나 재무계장이나 알까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다. 김종한 할아버지는 세무서에서 총 약 3년 반을 근무하였다.

직업 내용

그 후 김종한 할아버지는 농촌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농촌지도소에 땅이 없어서 그가 땅 1,000평을 내놓고 시험장을 만들어 각 품종별, 모 이양 시기별, 그리고 시기별 비료 시비 등을 연구하였다. 즉 어떤 종자를, 어느 때에, 무슨 거름을 어떻게 주어야 남원에서 벼농사가 잘 되는가를 연구하였다.

이때부터 머슴 세 명을 두고 벼농사와 소를 기르면서 농촌 운동을 계속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소가 전국에서 판매하는 데는 서울 마장동이고 집산지로는 남원이 최고였다. 해서 김종한 할아버지는 사육자들을 규합하여 축산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예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과일, 소채 등을 재배하면 객지 사람들이 다 사가고, 그 사람들만 좋은 일 시키고 생산자는 복잡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예협동조합도 만들기로 하였다. 그런데 축산협동조합은 그래도 만들기가 쉬웠는데 원예협동조합은 만들기가 어려웠다. 해서 청과주식회사를 만들어 법원 등기를 내어 약 2년 동안 운영하였는데, 이것도 손 벌리는 사람들이 많아 청과주식회사 사람들을 규합하여 명칭을 바꿔 그 조합원들을 원예협동조합원으로 하여 원예협동조합을 정식으로 만들어 서울 중앙회에 등록하였다. 이때 그의 후배들이 많이 도와줘서 축산협동조합과 원예협동조합 등의 등기 처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그는 재력보다도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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