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0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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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石文 |
영어의미역 | Epigraph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조성진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새겨진 명문(銘文).
[개설]
금석문(金石文)은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겨진 글자나 도형으로 쉽사리 마모되지 않고 오랜 세월 견뎌내기 때문에 내구성이 높다. 따라서 고대 등 과거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고증하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금석문은 크게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구분된다. 금문은 금속제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印章)·경감(鏡鑑)·범종(梵鐘)·도량형 등에 주출(鑄出)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며, 석문은 석제의 비(碑)·묘지(墓誌)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특히 비에 새겨놓은 금석문은 대개 사건 당시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의 상황을 기록하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금석문은 비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비는 크게 묘비, 유허비, 사적비, 중수비, 탑비, 정려비, 효열비, 선정비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금석문을 살펴본다.
[종류·시대·성씨별 현황]
논산 지역의 금석문은 대부분이 비문이며 종류별로는 보면 각각 묘비가 55기(신도비 10기·묘갈 25기·묘표 20기), 사적비가 9기, 교량비가 8기, 각석문이 15개소가 있다. 그리고 시대별로는 모두가 조선시대에 세워졌으며 삼국시대를 전후의 비나 고려시대의 비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논산 지역이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요충지였다는 점,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전승지인 천호산과 호국사찰인 개태사와 은진의 관촉사 등이 있었다는 점과 더불어 개태사에 고려시대의 비가 있었다는 김시습의 시가 전해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 이전의 비나 금석문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 비와 금석문은 고려의 멸망과 함께 연산 지역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 명문거족이 된 사족들이 세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산 지역의 광산김씨와 노성 지역의 파평윤씨의 비와 금석문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종류별 주요 비 및 형식]
1. 묘비
묘비는 묘소에 세우는 비갈을 총칭하는 말로 묘표, 묘갈, 신도비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묘표(墓表)는 묘의 봉분 앞에 묘의 주인공을 표시하기 위해 작은 돌에다 새겨 세운 비를 말한다. 묘갈(墓碣)은 죽은 자의 공적이나 사적을 명과 함께 새긴 비로 규모는 신도비보다 작으며 정3품 이하의 벼슬을 지낸 자의 묘에 썼다. 신도비는 보통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높은 벼슬(조선시대의 경우 종2품 이상)을 지낸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그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길에 세우는 비석으로 주로 생전에 세운 공로나 인품을 기록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논산 지역의 묘비를 구체적으로 보면, 먼저 묘표의 경우 형식은 주로 규수형·복연협형·원두형 묘표로 대별되나 팔작 비붕형의 가첨석을 사용한 묘표도 있다. 규수형 묘표의 대표적인 예로는 송문림(宋文琳) 묘표(1482년), 김집(金集) 묘표(1662년), 박증 묘표(1670년), 기계유씨 묘표(1874년)가 있다.
연잎을 엎어놓은 모양의 복연엽형 묘표로는 이철근 묘표(1580년), 김종윤 묘표(1583년), 김국광 묘표(1722년)등이 있다. 원두형 묘표로는 김유휘 묘표(1668년), 박종원 묘표(1672년), 서열 묘표(1694년), 서정수 묘표(1694년), 윤순거 묘표(1724년), 윤전 묘표(1724년), 윤수 묘표(1736년) 등이 있다.
그 외 팔작 지붕형의 가첨석을 사용한 묘표로는 윤황 묘표(1651년)와 송처자 묘표(1668년)가 있다. 이중 송처자 묘표는 비신이 82㎝ 크기의 작은 비신에 가첨석을 얹고 70㎝ 크기의 농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묘표는 묘표와 묘갈의 구분이 없이 봉분 앞에나 묘역에 세우는 묘비의 전형으로 굳혀졌다.
다음으로 묘갈의 경우 복연엽에 농대석을 갖춘 것과 이수에 농대석을 갖춘 것으로 대별되나 원두형 묘갈도 있다. 묘갈의 전형적인 형태인 복연엽에 농대석을 갖춘 묘갈로는 이장생 묘갈(1525년)과 서익 묘갈(1732년)이 있으며 이수에 농대석을 갖춘 묘갈로는 이장경 묘갈(1537년), 김임 묘갈(1561년), 김호 묘갈(1583년), 윤창세 묘갈(1634년), 김은휘 묘갈(1660년), 김성휘 묘갈(1663년) 등이 있다. 이중 김임 묘갈은 이수에 귀부를 갖추고 후면에 족보를 새긴 것이 다른 비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그리고 원두형의 묘갈로는 김철산 묘갈(1721년)이 있다.
끝으로 신도비의 경우 귀부를 갖춘 것, 이수에 농대석을 갖춘 것, 가첨석을 사용한 것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논산 지역에서는 귀부를 갖춘 신도비는 보이지 않으며 이수에 농대석을 갖춘 신도비로는 김국광 신도비(1489년), 김겸광 신도비(1492년), 김계휘 신도비(1604년), 김장생 신도비(1634년), 이향령 신도비(1664년) 등이 있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이수 대신에 가첨석을 사용하는 신도비가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김집 신도비(1659년)를 포함하여 윤진 신도비(1776년), 윤순거 신도비(1811년), 박동민 신도비(1818년), 윤전 신도비(1821년) 등이 있다.
2. 기타 비
논산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묘비 종류를 제외한 나머지 비로는 묘정비, 사적비, 유허비, 탑비, 교량비 등이 있다.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우는 비로 논산 지역에는 황산서원(현 죽림서원) 묘정비(1664년), 돈암서원 원정비(1669년), 만죽 서선생 묘정비(1867년) 등이 있다. 사찰을 세우거나 중수한 내용을 새긴 사적비와 중수비로는 쌍계사 중건비(1739년), 관촉사 사적비(1743년), 돈암서원 이건비(1903년) 등이 있다.
선인들의 유적을 기념할만한 곳에 비를 세우고 태어났거나 거주했던 내용을 그 업적과 더불어 찬양하여 세우는 유허비(遺墟碑)로는 성삼문 유허비(1673년)가 있다. 사찰에 세우는 탑비는 개태사나 쌍계사에 고승들이 많이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다리를 놓거나 중수하고 그 내용을 새기는 비인 교량비는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초포교 중수사적비(1674년), 은진미교비(1731년), 수탕석교 사적비(1675년), 석성 수탕석교비(1740년), 석성 수탕석교 중수비(1898년), 1차 논산석교 중수비(1846년), 2차 논산석교 중수비(1858년), 원항교 개건비(1900년)등이 있다.
한편 논산 지역 비 또는 금석문에서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노비들의 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비들의 비는 병자호란 당시 주인을 따라가서 싸우다가 전사한 주인의 시신을 찾아 고향으로 모셔온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노비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연산의 청동리 충노비(1853년)와 은진의 무작금 비(1668년·1877년)가 있다. 청동리 충노비는 이민진의 정려 옆에 세워져 있으며 무작금 비는 김수남의 묘소 아래와 정려 옆에 각각 하나씩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주요 각석문]
각석문은 자연 상태의 바위나 벼랑의 평평한 면에 새겨진 글자로 논산 지역의 경우 대둔산 수락계곡과 강경 옥녀봉 등을 비롯한 여러 곳에 다수 분포해 있다. 수락계곡에는 ‘탁영’(濯纓)과 ‘인지’(仁智)라는 암각문이 있다. 옥녀봉의 바위에는 자경 16㎝의 ‘잠영대’(蘸影臺), 자경 25㎝의 ‘산주’(汕住), 자경 16㎝의 ‘반조암’(返照岩), 자경 18㎝의 ‘귀암’(龜岩), 자경 36㎝의 ‘영포대’(影泡臺), 자경 18㎝의 ‘감당 옥롱’(鑑塘 玉聾), 자경 22㎝의 ‘옥녀봉’(玉女峯), 자경 24㎝의 ‘위용대’(爲容臺)라는 암각문이 있으며 강경포구의 조수의 흐름을 계산한 ‘해조문’(解潮文)도 있다.
또한 강경 팔괘정 암벽에는 자경 44㎝의 ‘몽괘벽’(夢挂壁)과 자경 21㎝의 ‘청초안’(靑草岸)이라고 새겨진 암각문이 있으며 연산 임리 옛 돈암서원 자리의 산자락 바위에는 자경 45㎝의 ‘돈암’(遯巖)이라는 암각문이 있다. 그 외에도 상월 학당리 박증 유허지에 자경 17㎝의 ‘암천처사조대’(巖川處士釣臺)라는 암각문이 있는데 이는 박증이 은거하면서 낚시를 즐기던 곳에 윤동원이 글씨를 써서 새겨 놓은 암각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