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1093 |
---|---|
한자 | 靜會堂 |
영어의미역 | Jeonghoedang Hal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산35-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연숙 |
성격 | 서재 |
---|---|
건립시기/일시 | 조선 중기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산35-3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구고운사 경내에 있던 조선 중기 문신 김계휘의 서재.
[개설]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1526~1582)는 1557년(명종 12)에 윤원형 당에 의해 삭탈관작, 문외 출송을 당하자 연산 지역으로 퇴거해 와서 구고운사 경내를 빌려 서재로 사용하고, 편액을 정회당이라 하였다. 『당중입의』, 『정회당 유장』에 의하면 정회당은 초입시에 합격하고 문리가 통한 유생에 한하여 입속을 시켰고, 입속자는 천거로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회당 유안』에 입록된 자들은 연산현의 사족 집안 자제들이다.
이를 통해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는 위학적인 성격을 지닌 서재임을 알 수 있다. 정회당의 조직은 유사 2명, 서기 1명, 고직 1명으로 매년 교체하였으며, 구고운사 승려로 하여금 잡무를 보도록 하였다. 이에 정회당 유생들이 관찰사에게 구고운사 승려의 일반 잡역을 면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정소(呈訴)가 여러 번 있었다.
광산김문의 김집과 한삼천(汗三川) 느티나무에 얽힌 구전(口傳)에 의하면, 느티나무는 본래 김집의 할아버지가 설립한 정회당 인근에 있던 나무였다. 하루는 김집이 정회당에서 밤늦도록 학문에 전념하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할아버지가가 홀연히 나타나 빨리 근처 느티나무를 잡으라는 계시(啓示)를 하였다 한다.
김집이 다소 괴이하게 여겼으나 조부의 현몽(現夢)이라 자리에서 일어나 느티나무를 잡자 갑자기 큰 홍수가 일어 한삼천 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다행히 느티나무를 부여잡은 그는 무사하였다 것이다. 이 구전으로 보아 정회당은 광산김문의 자제는 물론 연산현 사족 집안 자제들의 강학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김계휘가 구고운사 경내에 편액을 걸어 정회당이라 하였는데, 효종이 구고운사 절터를 김집에게 사패지로 하사하자 구고운사는 왼쪽 능선 너머에 있는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로 옮겨 갔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김집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현황]
현재 정회당 건물은 없으나, 정회당이라는 편액은 돈암서원 한쪽의 독립 건물에 걸어놓았다.
[의의와 평가]
정회당은 연산현 사족들이 강마(講磨)하는 장소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서재였으며, 사계 김장생의 양성당 건립과 돈암서원 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