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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001475
한자 江景邑獨立萬歲運動
영어의미역 Hurrah Movement for Independence in Ganggyeong-eup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4월 7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논산시 강경읍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논산의 강경읍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개설]

강경읍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논산의 강경읍 일원에서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7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을 말한다. 강경읍은 논산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전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주로 옥녀봉과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이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따라서 일제의 탄압도 그만큼 극심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0년에 걸쳐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헌병경찰제를 통한 무력을 앞세워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항일 독립 정신이 지속적으로 고취되고 있었으며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대두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고종의 붕어가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됨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강경읍 일원의 주민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강경읍 일원에서는 같은 해 3월 10일에 처음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중심인물은 엄창섭(嚴昌燮)이었다. 엄창섭은 이미 같은 해 3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 웅포면 대붕리에서 군산 영명(永明)학교 학생 강금옥(姜金玉)으로부터 권유받아 독립만세운동을 결심하였다. 엄창섭은 같은 달 6, 7일경에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부여 세도의 사립 창영(昌永)학교에서 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과 함께 10일 강경읍 장날에 모이는 군민과 청년 다수에게 태극기를 교부함과 동시에 동참을 호소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8일에는 강경읍에서 태극기 제작용 종이 60매와 염분 30전 어치를 구입하였으며 추가로 김종갑(金鍾甲)과 추성배(秋聖培)를 합류시켜 10일 아침까지 창영학교에서 태극기 200본을 함께 제작하였다. 한편 엄창섭의 부탁을 받은 서삼종(徐三鍾)이 제작된 태극기를 가마니에 넣어 강경읍 옥녀봉으로 운반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사전 준비를 마친 엄창섭 등은 강경읍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군중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동지들이 합류하였으며 이어 엄창섭·고상준·추병갑·정기섭(鄭沂燮)·서삼종·강세형(姜世馨)·윤동만(尹東萬) 등과 군중들은 오후 3시경에 옥녀봉으로 집합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옥녀봉에서 내려와 강경읍 윗시장[上市場]에 도착하였으며 시장에 있던 김종갑·추성배·한규섭(韓圭燮)도 가세하여 군중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권유하였다. 군중은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인 거주지인 본장통(本場通)을 경유하여 시장과 읍내 각처를 행진하였다.

12일에는 독립만세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결사대(決死隊)’라는 단체를 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사전에 일경에 발각되어 주동자를 포함한 관련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5일의 장날을 이용한 재 거사를 위해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나 이 또한 일경에 발각되어 태극기 55매를 압수당하였다.

20일에는 채운면송재기(宋在紀)·이근석(李根奭)·이봉세(李鳳世)·이근국(李根國, 根五) 등도 태극기 360본을 제작한 후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장으로 내려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였으며 윗시장에서부터 만서정(萬西町)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31일에는 문상희(文商羲)의 활약으로 약 300호의 한국인 상점들이 철시(撤市)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 의식을 표출하였다.

문상희는 26·27일 양일에 걸쳐 자택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일본인이 조선인을 대우함에 있어 비리무도(非理無道)하니 차제에 조선을 독립시키는 운동을 일으키자’라는 내용의 경고문(警告文) 약 100매와 ‘조선 독립시위운동을 위하여 상가를 폐쇄토록 하자’라는 내용의 철전문제(撤廛問題) 수십 통을 인쇄하였다. 27일 밤 유인물을 강경 읍내 각 민가에 직접 배포하였으며 강경 중정의 이성삼(李成三)의 집에서 성석기(成錫驥)에게 ‘조선독립을 성원하는 광고문’이라며 경고문 약 10여 통을 주어 이를 읍내 북정으로 갖고 가 배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상희의 이러한 노력으로 31일 강경 읍내에 한국인 상점들이 일제히 철시를 하여 강한 단결력과 독립 의식을 과시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날인 4월 1일에는 일본인 상점에 석유를 뿌려 방화하려는 시도가 있어 일본인 상점이 개점하지 못하는 일도 발생하였으며 철시 중에도 약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불렀다. 또한 같은 달 4일에는 약 5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7일의 장날에도 만세운동을 예상한 경찰서장·군수 및 수비대장이 사전 협의를 통해 개장 및 시장 진입을 금지하자 면민들은 밤을 틈타 인근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결과]

1919년 3월 10일부터 4월 7일까지 이루어진 강경읍의 연이은 독립만세운동의 결과 이를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일제에 체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엄창섭과 문상희는 징역 2년, 고상준·추병갑은 징역 1년, 이근석·성석기는 징역 10월, 강세형·윤동만·정기섭·이봉세·이근국은 징역 8월, 김종갑·추성배는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으며 서삼종과 한규섭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1.25 인명 오류 수정 성석진(成錫鎭) -> 성석기(成錫驥)
이용자 의견
최** 성석진이 아니라 성석기 (成 錫 驥) 입니다.
오타인듯하오니 수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답변
  • 디지털논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소중한 의견을 검토하여 해당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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