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C01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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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염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내수 |
강경이 평양 및 대구시장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으로 손꼽혔던 일제강점기에 최대 인구는 3만 명에 달하였다. 상인 등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약 10만 명 정도의 인구가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인구의 집결은 상대적으로 문화시설의 보급도 빨리 오게 하였다.
1920년대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고, 강경만의 전기 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에 1백 평 규모로 세워졌다. 또한 상하수도도 놓아졌고, 이때 호남지방 최초로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그 밖에 중요 관공서와 은행 등도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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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경제상 중요한 위치에 있고 인구도 증가하여 강경은 연간 1천만 원의 수출입액을 올리게 되었다. 더욱이 강경 인사들이 강경은 상업으로 일어서야 된다는 기개로 분발함으로써 상권범위신장에 노력하여 산업 교통로의 완비, 수로 선착장의 설비, 상업보조기관의 충실화 등이 진행되었다.
강경의 무역 품목을 보면, 수출은 미곡을 제일로 하고, 새끼가마니·목화·쇠가죽·콩·잡곡 등이었고, 수입은 해산물을 주로하고 면포·조·기타 잡화류 등이었다. 1919년 통계에 의하면 철도와 수로 및 우편 등의 수출입 주요품 무역총액은 900여만 원에 달하며, 이외에 중요품이 아닌 물자로서 추산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실제로는 1,000만 원을 초과한다.
또한 강경시장은 상시(上市), 하시(下市), 황산시(黃山市)의 3개소 시장이 있었다. 인접해 있는 10수개 군(郡)의 여러 종류의 농산물들이 이곳에 집결되고, 수입품 역시 이곳을 통하여 각지로 나간다.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경시장은 번성하였다. 강경장이 서면 금강 하류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가득 실은 고깃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무역선들이 줄을 지어 몰려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도 이곳으로 들어와 선창가는 뱃사람들로 북적대었다. 봇짐장수나 등짐장수, 우마차를 끌고 모여든 농부들로 강경포구는 시끌벅적하였고, 야바위꾼, 좌판장수, 약장수도 몰려들어 한몫을 했고 술집마다 술을 따르는 여자들의 노래 가락 소리가 대낮부터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현재의 옥녀봉 아래 북옥리는 당시 선창가로 양쪽으로 늘어섰던 1백여 곳 이상의 색주가(色酒家), 하루에 소 한 마리씩을 잡았던 강경여관, 삼남지방에서 최초로 세워진 호남호텔 등이 당시의 번성함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밤마다 부둣가의 술집들은 불야성을 이루었으며, 뱃사람들이 노래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또한 명월관과 대성관 등 유명한 요정에는 항상 60~70명의 기생들이 들끓었고, 읍내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는 인력거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