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을 폐합할 때 가전리(柯田里)의 ‘가’자와 사장리(沙場里)의 ‘사’자를 따서 가사리(柯沙里)라 하였다. 가전리는 옛날 갈대밭이 많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갈밧[柯田里], 사장말[沙場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 마산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폐...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시대에는 홍주목 운천면 가좌동리와 서산군 동음암면 남당리 지역이었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해미군 운천면에 속하여 있던 가좌동리를 상가리(上佳里)와 상리(上里)로 분할하였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해미군 운천면 상가리, 상리, 서산군 동음암면 남당리와 고양동리(高陽洞里)의 일부를 합쳐서 서산군 운산면 가...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 후기 무학대사가 이 섬에서 수행 중 유난히 밝은 달빛을 보고 불도를 깨달았다 하여 간월도(看月島)라 이름 붙여졌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간월도라는 관련 지명이 보인다. 고려 후기부터 간월도라 불렸고,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태안군 안상면 소속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서산군 안면면 간월도...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갈마리(渴馬里)라는 이름은 마을 지형이 풍수상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고 있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으로 되어 있어 붙여졌다는 설과, 큰 벌판이 곶이를 이루었다 하여 갈마곶(渴馬串), 갈마지, 갈마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갈마곳[渴馬洞]이라는 관련 지명이 보인다. 갈마리는 조선...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갈현리(葛峴里)의 ‘갈’자와 산지동(山芝洞)의 ‘산’자를 따서 갈산리(葛山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갈우고지[葛峴里], 회츈골[會仙洞], 무르틔[山芝洞], 좌셰[佐世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갈산리는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회선동리와 좌세리(佐世里) 지역이였으...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강촌(江村)의 ‘강’자와 서당동(書堂洞)의 ‘당’자를 따서 강당리(江堂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강촌, 셔당동[書堂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강당리는 조선 시대에 화변면 우천리 지역이었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강촌, 시동(詩洞), 서당동으로 나뉘었다....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전설상으로는 저수지에 위령제를 지내 저수지의 범람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낸 사람의 이름인 강수에서 따 강수리(江秀里)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 강경리(江鏡里)의 ‘강(江)’자와 수현리(秀峴里)의 ‘수(秀)’자를 따서 강수리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강경리...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거산리(巨山里)의 ‘거’자와 하성리(下城里)의 ‘성’자를 따서 거성리(巨城里)라고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하셩산[下城里], 금뫼[巨山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거성리는 조선 시대에 홍주목 운천면의 하성산리(下城山里)와 거산리, 서산군 동음암면 동거리, 서산군 동암면...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고음곡리(古音谷里)의 ‘고’자와 두산리(斗山里)의 ‘산’자를 따서 고산리(古山里)라 이름 붙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곰실[古音谷里], 말산[斗山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고산리는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고음곡리와 수철점리가 있었던 지역이다. 1895년의 행정 구역 개...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파도리(古波島里)는 본래 파지도(波知島)라 하였는데, 1974년에 간행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고려 때 파지도영(波知島營)을 두었다가 조선 태종 때 호리로 수영을 옮기게 되면서 옛파지섬 또는 고파지도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파지도만호(波知島萬戶)의 수영이 바다 가운데 30리에 있으니,...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고색리(高色里)를 고풍리(高豊里)로 고쳤다. 이는 주민 생활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군자동(君子洞), 무릉동(武陵洞), 운곡[雲谷里], 고빗[高色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고풍리는 조선 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 고색리와 군장동리가 있...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관기리의 ‘관’자와 하류곡리의 ‘유’자를 따서 관유리(館柳里)가 되었다. 조선 시대 해미현 동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해미군 동면 관기리와 하류곡리를 합쳐 서산군 지성면 관유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 지성면을 해미면으로 고치면서 해미면 관유리가 되었고, 1995년...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귀밀리(貴密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귀밀’이라는 명칭 유래는 알려진 바가 없다. 『서산의 지명사』에 의하면 예전부터 귀밀리는 비록 그 규모는 작을지라도 세대를 이어 살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특히 귀밀리 논은 어떤 풍흉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좋은 경작지로 인근에 소문이 났...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금곡리의 ‘금’자와 추학리의 ‘학’자를 따서 금학리(金鶴里)라 하였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쇠골[金谷里], 츄학리[秋鶴里], 마져리[麻田里], 쇼길리[小吉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금학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군 영풍창면과 노지면 지역으로, 1...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덕송1리에 있는 조선 전기 효자 기응세(奇應世)의 정려. 서산시 팔봉면 덕송리 팔봉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약 2㎞ 정도 가면 덕송1리에 이르는데, 기응세 정려(奇應世旌閭)는 마을 입구 도로 좌측의 남동향 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기응세 정려는 기응세[1539~158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85년(선조 18)에 명정을 받아...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기지리(機池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 논에 두레 10개로 퍼도 마르지 않을 이름난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샘이 무너지지 않도록 둘레에 나무 빈지를 쌓았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지리, 1911년...
-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안주목사 김연(金堧)이다. 부인은 재령 이씨이며, 사위 중 한 명이 광산 김씨인 용천(龍川) 김지남(金止男)이다. 경주 김씨가 서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 명종 조[1545~1567]에 만년의 은거지로 이곳을 택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산에 이거하여 정착한 것은 김연의 큰아들인 김호윤(金好尹)에 의...
-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유생.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이다. 아들은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다. 손자는 김홍욱(金弘郁)이다. 1500년대 중반 김연이 정계 은퇴 후 서산에 자리를 잡아 경주 김씨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모여 살았다. 마을에 큰 다리가 있어 유계리의 경주 김씨를 ‘한다리 김씨[大...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남산리의 ‘남’자와 정동의 ‘정’자를 따서 남정리(南井里)라 하였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남산뫼[南山里], 공슈골[葛山里], 얌골[井洞]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남정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군 인정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심곡리(深谷里), 신흥리(新興里),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한틔골, 집푸실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대곡’이라는 명칭은 『조선지지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신흥리의 한글 표현 한틔골의 한자 표기인 대치(大峙)의 ‘대’자와 심곡의 ‘곡’자를 따...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대두리(大頭里)는 대두리와 봉락리(鳳洛里)의 경계선상에 있는 한점산의 머리 위치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한점이 크다는 의미로 변하였다는 설과 마을 지형이 큰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한머리 또는 대두라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머리[大頭里], 사양골[洛陽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대동의 ‘대’자와 황곡의 ‘황’자를 따서 대황리(大黃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대동리와 방길리(方吉里),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동[大同], 황골[黃谷里], 방길리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덕동(德洞)의 ‘덕’자와 상송리의 ‘송’자를 따서 덕송리(德松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덕동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덕동, 위숄말[上松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문현면 지역으로, 19...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과거 이곳에 몽웅역(夢熊驛)이 있어 역말, 역촌, 역리라 불리던 것이 동암리(冬岩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도 동암리의 한글 표현은 역말로 기록되어 있다. 『서산의 지명사』에서는 마을이 동쪽 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져 특히 겨울은 더욱 춥고 길게 느껴졌기 때문에...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둔산리(芚山里)의 ‘둔’자와 당산리(堂山里)의 ‘당’자를 따서 둔당리(芚堂里)라 하였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둔산[芚山里], 당갈미[棠山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둔당리는 조선 시대 서산군 인정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29년 간척 매립이 있기 전 마룡리(馬龍里)에 애기장사 전설에 따라 이름 붙여진 용마(龍馬) 연못이 있었다. 부모가 애기장사를 죽여 버린 뒤 그 곳에서 검은 말[驪] 또는 용마가 나왔는데 3일간 연못 주변에서 하늘을 보며 울다가 어디론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 전설을 따라 마룡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모기대리(毛其大里)의 ‘모’자와 양월리(梁越里)의 ‘월’자를 따서 모월리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모기대리, 양월리 등의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모월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군 인정면 지...
-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충신.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달원(達源).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문응벽(文應璧)이다. 문성해(文成海)[1540~?]는 1575년(선조 8) 서산의 유생들과 함께 서산향교 이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588년(선조 21) 49세의 늦은 나이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 57위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공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 반계리(磻溪里)의 ‘반’자와 만양리(晩陽里)의 ‘양’자를 따서 반양리(磻陽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만양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만양니[晩陽里], 고현[磻溪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반계리의 한글 표현인 고현이란 명칭과...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봉동(鳳洞)의 ‘봉’자와 낙양동(洛陽洞)의 ‘낙’자를 따서 봉락리(鳳洛里)라 하였다. 봉락리라는 이름은 과거 이곳에 있었던 서씨 묘를 옮길 때 봉(鳳)이 나와서 뒷산에 떨어졌다는 전설에 기인한다는 설도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봉골[鳳洞], 사양골[洛陽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적돌강(積乭江)에 있는 커다란 바위가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부석면(浮石面)이라 하였다. 백제 시대에는 기군(基郡) 지역에, 신라 시대에는 부성(富城)에 속하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서산군(瑞山郡)에 속하였다. 본래 마산면(馬山面)이라 하여 시동(柿洞), 갈마동(渴馬洞), 월계리(月溪里) 등 11개 리를 관...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산저리의 ‘산’자와 동막리(東幕里)의 ‘동’자를 따서 산동리(山東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산저리·동막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산져리[山底里], 동막리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산동리는 조선 시대의...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당산리(堂山里)의 ‘산’자와 수원동(水源洞)의 ‘수’자를 따서 산수리(山水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당산리, 수원동,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수원골[水源洞], 당산니[堂山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산수리는 조선...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삼봉리(三峯里)의 ‘삼’자와 송치리(松峙里)의 ‘송’자를 따서 삼송리(三松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삼봉리, 송치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삼봉니, 솔틔, 위터골[上基里], 위버드실[上柳谷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상촌동(上村洞)의 ‘상’자와 성동(城洞)의 ‘성’자를 따서 상성리(上城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궁말[上城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홍주목의 월경처(越境處)였다. 상성리는 조선 시대에 홍주목 운천면에 속하였다가 1895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해미군에...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천수만 안쪽 창리 해안에 위치한 포구. 창리포구는 부석면의 남쪽 끝 해안에 위치한다. 동·서·남 3면은 천수만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 태안군 남면, 남쪽으로는 안면도와 마주보고 있다. 창리에 속한 자연 마을은 창말·목말·구장터 등이 있고, 부속 도서로 대섬·쏘아섬·닭섬·검조도·시루섬·토끼섬 등을 거느리고 있다. 창리포구는 본래 서산군 화...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마을이 쥐뿌리재라는 고개 아래에 있어 잿골 또는 성동(城洞)으로 불렸으나, 의성 김씨가 살게 되면서부터 잿 ‘성(城)’자를 이룰 ‘성(成)’자로 바꾸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14년 이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나 『구한국지방행정구...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소동(小洞)의 ‘소’자와 중리(中里)의 ‘중’자를 따서 소중리(小中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터[新基里], 동거리(東巨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소중리는 조선 시대 때 서산군 동음암면 동거리와 홍주목 운천면 상성리에 속한 지역이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송정리(松亭里)의 ‘송(松)’자와 시동(枾洞)의 ‘시(枾)’자를 따서 송시리(松枾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숑졍리[松亭里], 감골[枾洞], 내숄[內松里], 갈마곳[渴馬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마산면 불모동리(不毛洞里)에 속하였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하장수동(下長壽洞)의 ‘수’자와 묵당리(墨堂里)의 ‘당’자를 따서 수당리(壽堂里)라 이름 붙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아장사무골[下長壽里], 산밋[黑堂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수당리는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의 일부분이었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상...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상장수동(上長壽洞)의 ‘수’자와 와평리(瓦坪里)의 ‘평’자를 따서 수평리(壽坪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장사무골[長壽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수평리는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장생동리였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와평리, 상장수동, 하장수동(下長壽洞),...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의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여러 마을을 합하면서 동신리(東新里)에서 ‘신’자와 고창동(高昌洞)에서 ‘창’자를 따서 신창리(新昌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고창골, 벌말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신창리는 조선 시대에 서산군 동음암면 개심동리, 고창동리, 벌리(伐里)가 속한 지역이다. 벌리는 현 원벌리(元...
-
조선 시대 서산 출신의 효자. 안천년(安千年)은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솥을 여러 개 걸어 놓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골라 드시게 하였다. 넉넉한 양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자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나누었다. 안천년은 또한 아버지를 위해 후처를 구해 드리고자 노력하였는데, 하루는 여자 거지가 동냥자루를 들고 찾아오자 대문 밖으로 나가 큰절로 맞이하였다. 그리...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기러기 떼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여 안호리(雁好里)라 하였다가 안호리(安好里)가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을 앞에 큰 방죽이 있어 이로 인하여 안수리(安藪里)로 불렸을 적도 있었으며, 겨울이 되면 기러기 떼들이 방죽에 날아와 겨울을 지내다가 돌아가는 철새 도래지여서 안호리(雁好里)라 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애당리의 ‘애’자와 언정리의 ‘정’자를 따서 애정리(艾井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애당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쓕당리[艾堂里], 은졍리[彦井里] 등의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애정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야촌(野村)의 ‘야’자와 당산리(堂山里)의 ‘당’자를 따서 야당리(野堂里)라 하였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들말[野村], 원당리(元堂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야당리는 조선 시대의 서산군 인정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사양동의 ‘양’자와 우길리, 방길리(方吉里)의 ‘길’자를 따서 양길리(陽吉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방길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방길리, 사양골[斜陽洞], 우길리(牛吉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에...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양림리(良林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이 평평한 곳에 입지하여 햇볕이 잘 들므로 일명 ‘해말’ 또는 ‘양동(陽洞)’이라고도 한다. ‘양림’이란 명칭은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양동의 ‘양’ 자와 마을 곳곳에 조성되어 있던 소나무 숲을 의미하는 ‘수풀 림(林)’ 자를 합쳐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어은동(漁隱洞)의 ‘어’자와 송치리의 ‘송’자를 따서 어송리(漁松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어은동리(漁隱洞里), 정자리(亭子里),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어은동, 졍자동[亭子洞], 숄테[松峙里] 등 관련 명칭이 확...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억대리(億垈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업더지[億垈里]·업터지 등으로도 불린다. 그 명칭은 『서산의 지명사』에서는 옛날 살기가 어려웠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살았던 것에서, 또는 해미장과 근거리에 있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서 연유하였다고 추정하...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여미리는 백제 이후 조선 초기까지 여미현(余美縣) 지역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해미현 이도면에 속하였던 지역이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여미리와 이문리(里門里)로 분할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여미리와 리문리를 통합하여 서산군 정미면 여미리로 개편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비변니[余...
-
전통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에 있었던 역로의 교통·통신 및 숙박 시설. 역원은 전통 시대 역로(驛路)에 설치되었던 국영 숙식 시설이다. 관리가 파견되어 역마와 역로를 관할하고, 길을 지나는 관원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과 관수 물자를 운반하는 육상 교통의 핵심 기관이다. ‘역(驛)’은 대로변에 12㎞마다 설치한 교통 통신 조직이라면, ‘원(院)’은 여행...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오동(烏洞)의 ‘오’자와 백학동(白鶴洞)의 ‘학’자를 따서 오학리(烏鶴里)가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오동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가금골[烏洞], 아골[白鶴洞]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오학리는 조선 시대 해미현...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누운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누운고개라고 하기도 했고, 또는 마을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와우리(臥牛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암소고리[牛峴里] 등 관련 명칭이 보인다. 와우리는 조선 시대에 덕산군 외야면 슬치리에 속한 지역으로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해미군 부산...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용연리(龍淵里)의 ‘용’자와 장항리(獐項里)의 ‘장’자를 따서 용장리(龍獐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룡못[龍淵里], 노로목니[獐項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용장리는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장항리, 묵현리(墨峴里), 장평리(場坪里), 숙용평리(宿龍坪里)에 속하...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의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자연 마을인 용비동(龍飛洞)에서 ‘용’자와 보현동(普賢洞)에서 ‘현’자를 따서 용현리(龍賢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해미군 부산면 갈골[葛洞], 보현동, 벌말[伐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용현리는 용현1리와 용현2리로 구성된다. 용현1리는 조선 시대에 서산군 동음암면 갈...
-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여러 마을을 합하면서 운천면(雲川面)에서 ‘운’자와 부산면(夫山面)에서 ‘산’자를 따서 운산면(雲山面)이 되었다. 운산면이라는 이름이 가야산에서 유래하였으며 구름 속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사실 가야산과 전혀 관련이 없이 생겼다. 운산면은 서산시에서 연혁이 가장 복잡한 면...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웅소성리(雄梳城里)는 마을 동쪽 지붕재 남쪽 끝에 웅소성[어리성]이라는 토성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웅소성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어루셩니[雄梳城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 해미현 남면...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원금리(元琴里)의 ‘원’자와 벌리(伐里)의 ‘벌’자를 따서 원벌리(元伐里)라고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장동(壯洞), 원금의[元琴里], 별말[伐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원벌리는 조선 시대에 홍주목 운천면 벌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해미군...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시대 때 홍주목(洪州牧)의 교통 요지로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원집이 있어 원벌 또는 원평리(元坪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원벌, 졀[元上里], 으름[義峴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 홍주군 합북면 북원당리, 남원당리, 영산곳리 등 세 마을이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해미군 부산면 원...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앞 시냇물에 비친 달빛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달내, 달내말이라 하였는데 이를 한역하여 월계리(月溪里)라 하였다. 또는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이 맑아서 달빛에 비치면 하늘에 있는 달이 냇물 속에도 보여 달내[月溪]라는 이름을 얻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월계리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
조선 후기 서산 관아의 서리. 유윤당(柳潤塘)의 가계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호산록(湖山錄)』에 ‘전춘(全春), 경준(景俊) 형제도 비록 서리라고 하나 천성이 양순하고 착하여 집에 살면서 모친을 봉양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리들이 모두 피란을 가 버렸지만 구실아치인 유윤당은 서산 관아에 남아 예부터 전해져 오는 문서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읍내리(邑內里)는 조선 시대 서산 해미읍성이 있던 해미현의 중심 마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서산 해미읍성은 1418년(태종 18)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이 해미현으로 옮겨진 후 1651년(효종 2) 다시 청주 상당성으로 옮길 때까지 233년간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이었던 곳이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응평리(鷹坪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에 산이나 언덕, 숲 등이 없이 거친 흙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판이 있어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서산의 지명사』에는 옛날 동암리가 역말이었을 때 말들이 병들어 죽게 되면 거친 벌판에 버렸고, 그 죽은 말고기 때문에 매들이 모여들게 되어 ‘매벌’이 되었다는...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에 있는 효자 이종형(李宗馨)의 정려. 서산시 팔봉면 소재지 어송리에서 동편으로 3.5㎞ 가면 국도 32호선이 나오는데, 국도 32호선을 타고 태안 방향으로 2㎞쯤 가면 북측 도로변 송림 안쪽에 이종형 정려(李宗馨旌閭)가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종형의 효행이 알려져 1932년에 성균관(成均館)으로...
-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정면(仁政面)의 ‘인’자와 노지면(蘆旨面)의 ‘지’자를 따서 인지면(仁旨面)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인정면·노지면·군내면(郡內面) 지역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인정면·노지면에 속한 여러 동리(洞里)와 군내면 역리, 마산면 월계리 일부를 합쳐 서산군 인지면...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3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임영주(林榮周)의 정려. 임영주[1828~1865]의 본관은 평택으로 자는 선화(善化), 호는 효당(孝堂)이다. 천성이 후덕하고 효심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기기에 정성을 다하니 임영주의 효행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 사실은 1905년(고종 42)에 이종림(李種林)이 쓴 정려기...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호3리에 있는 장기덕(張基德)의 처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정려. 창녕 성씨는 정려가 위치한 호리에 살고 있는 장기덕에게 시집와 살다가 1933년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었다. 전언에 의하면 창녕 성씨의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온 집안사람이 모였는데, 창녕 성씨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이미 목숨을 끊은 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이...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저성리(猪城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지형이 두툼하여 도투성 또는 저성이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또 일설에는 옛날 마을 주변에 있던 작은 토성의 생김새가 마치 돼지처럼 생겼다 하여 돼지성으로 불렀는데, 당시 방언으로 돼지는 ‘돗’으로 불렀기 때문에 돼지성을 돗성 또는 도투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전천리(前川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남면 지역으로, 마을 앞에 해미천이 흐르고 있어 앞내·전내 등으로 불렸다 하는데, 이것의 한자 표기가 ‘전천(前川)’이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상전천리·하전천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위쳔[上前川里]·아쳔...
-
고려 시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현(縣). 정해현은 현재의 서산시 해미면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때에 고구현(高丘縣)의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이 만들어졌다. 995년(성종 14)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는데 운주(運州)는 현재의 홍성군에 해당된다. 운주에는 군이 3개, 현이 11개가 소속되어 있었다. 정해현은 운주에 소속된 11개 현 가...
-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진주. 호는 지산(芝山). 할아버지는 정윤표(鄭允彪)이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정건(鄭騫)이다. 정홍인(鄭弘仁)은 서산 지공(芝公)에서 출생하여 지산이라는 호를 썼다. 광해군[재위 1609~1622]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때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산리(造山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海美縣) 동면(東面) 지역으로, 1974년 간행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해미읍을 위해 과거 조그마한 산을 만들고 숲을 조성하였던 것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조산리가 위치한 해미읍 서남쪽은 서해로 열려진 허허벌판이기 때문에, 바람이나 추위에 대한 일종의 방어막 의미로...
-
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지에서 지곡이 본관인 충청남도 서산시 세거 성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호산록(湖山錄)』,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서 서산과 관련된 지리지 성씨 조에는 서산과 지곡의 토성으로 문씨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본관은 분명치 않지만, 서산이나 지곡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호산록』에 등장하는 문성해...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지파동(芝巴洞)의 ‘지’자와 산저리(山底里)의 ‘산’자를 따서 지산리(芝山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지파동(芝把洞), 산져리[山底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지산리는 조선 시대 화변면 산저리에 속하였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산저리, 달천리(達川里), 시동(...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진산리(榛山里)의 ‘진’자와 장북리의 ‘장’자를 따서 진장리(榛墻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고성리, 장북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진산리, 고셩리[古城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영풍창면...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북쪽에 위치한 금강산과 장군봉 사이 수리봉[車峯, 鷲峯] 또는 현재 차리1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 수랑재와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1974년 간행된 『한국지명총람』에는 수리재 아래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수릿골 또는 차동(車洞)이라 부른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1911년 간행된 『조선지...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창리(倉里)는 창말, 창촌(倉村), 또는 왜현리(倭懸里)라 불리었다. 조선 시대에는 주사창(舟師倉)이 있어서 창말 또는 창촌이라 불렀다. 왜현리는 옛날 침입해 온 왜구들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므로 이때부터 왜현리라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챵말[倉村]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창리는...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창촌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창고 터. 창리(倉里) 창촌(倉村)은 조선 시대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던 지역이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세곡의 저장 공간이었고, 또한 배를 만드는 창고인 선박소의 기능도 하였다. 창촌 창터는 1800년대에 편찬된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화변면 왜현리...
-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달제(崔達悌)[1669~1731]는 서산의 지곡면 독주동(犢走洞)[현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 애현마을 동남쪽]에 살았다. 부모가 희귀한 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니 하루는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약이 있는 곳을...
-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 통일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이다. 최일진(崔日鎭)[1727~1781]은 효심이 깊어 정성과 예로써 부모를 섬겼다. 아버지가 병들자 6년 동안 백방으로 치료법을 수소문하였다. 부모의 병세가 위중해졌을 때는 그 상태를 알기 위해 대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부모가 죽어 장사를 지낼...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의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취포리(翠浦里)의 ‘취’자와 평동(坪洞)의 ‘평’자를 따서 취평리(翠坪里)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翠坪里], 토골[坪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취평리는 조선 시대 마산면(馬山面) 토동리 지역이었다. 1895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마산면 사동(社洞), 평동...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에 속하는 법정리. 옻나무밭이 많으므로 옻밭굴, 옻밭말[漆田村], 또는 칠전(漆田)이라 하였으나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옻 ‘칠(漆)’자를 쓰는 칠전리(漆田里)에서 일곱 ‘칠(七)’자를 쓰는 칠전리(七田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옷박골[七田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칠전리는 조선 시대 화변면 칠전리에 속하였...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조선 시대 명종(明宗)의 태(胎)가 묻힌 태봉(胎峰)이 지역 내에 있어서 태봉골[胎封洞] 또는 태봉이라 하였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운천면(云川面) 장동(壯洞)과 부산면(夫山面) 봉골[胎封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태봉리는 조선 시대 서산군 동음암면 갈동과 홍주목 운천면 장동에 속하여 있던 지역이다....
-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팔봉면(八峰面)은 면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팔봉산(八峰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1619년(광해군 11)에 간행된 『호산록(湖山錄)』에 의하면 “팔봉산은 군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여덟 봉우리가 기이하게 산 위에 나열되어 있으므로 팔봉산이라 부른다”라고 하여 그 유래를 설명해 주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서산군 영풍창...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팔곡리(八谷里)의 ‘팔’자와 중산리(中山里)의 ‘중’자를 따서 팔중리(八中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팔고리[八谷里], 즁뫼리[中山里]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해미현 이도면 팔골리와 중산리가 있었던 지역으로 1895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중산리에서 이티리가 분할되고...
-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땅과 자연 형세에 관한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 풍수지리(風水地理)는 인간의 삶이나 죽음과 관련된 장소, 가령 묘지, 가택, 관청, 사찰, 마을, 도시, 수도 등의 입지 선정 및 방위 배치, 공간 구성 등에 사용해 온 한국의 전통 지리학이자 공간 인식 체계이다. 풍수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자연환경 그리고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 등에 관심을 갖...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풍전리(豊田里)는 조선 시대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에 속한 풍전역(豊田驛)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풍전역을 확인할 수 있어 그 명칭의 기원이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역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
-
충청남도 서산시에 속하는 행정면. 1407년(태종 7) 정해현의 ‘해’자와 여미현의 ‘미’자를 따서 해미면(海美面)이라 이름하였다. 조선 시대에 해미현의 동면과 남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동면과 남면에 속한 동리와 서산군 동암면 석천리 일부를 합쳐 서산군 지성면으로 개편하고, 관유리, 귀밀리, 기지리, 대곡리, 동암리, 반양리, 산수리,...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마을.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는 다양한 성씨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다만 현재에도 조사를 통해 그 유서가 확인된 해미면의 집성촌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한 조선 후기의 성씨들이 형성한 마을들이 대부분이다. 해미면에는 대곡리 전주 이씨, 대곡리 경주 김씨, 황락리 여양 진씨, 관유리 전씨[정선...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호리(虎里)는 마을의 지형이 마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호랑이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호두리, 그리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 내호두리(內虎頭里), 외호두리(外虎頭里)라는 명칭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풍수(風水) 형국상 호랑이 모양의...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신장1리에 있는 개항기 열녀 홍종학의 처 창원 황씨(昌原黃氏)의 정려. 홍종학의 처 창원 황씨는 인근 홍성에서 황민수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당진 석문면 삼봉리에 사는 홍종학에게 출가하였는데, 혼인 2년 만에 사별하였다. 그 뒤 정성으로 삼년상을 마쳤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1901년(고종 38)에 음독하였다. 서산 시내에서 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홍천리(紅泉里)는 조선 시대 해미현 동면 지역으로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해미군 동면의 분홍리, 천곡리, 동산리와 서산군 동암면 석천리 일부를 합쳐 홍천리로 하고 서산군 지성면에 속하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분홍리(分紅里)가 보이며, 1911년 간행된 『...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화계리(花溪里)의 ‘화’자와 수현리(秀峴里)의 ‘수’자를 따서 화수리(花秀里)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성산리(星山里),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분토골[花溪里], 반계리(磻溪里), 수현리, 성산리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된...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황조촌(皇朝村)의 ‘황’자와 일락촌(日洛村)의 ‘락’자를 따서 황락리(皇洛里)라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일악동리,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일낙골[日洛洞], 터골[皇朝村],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 일락동 관련 명칭이 확인된다....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황락리 미륵골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미륵불. 황락리 미륵은 해미 읍성 축조 시에 건립한 장승이다. 마을에서는 미륵이라 부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솟대 또는 문인석이라고도 하고, 선돌이라고도 한다. 황락리 미륵은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는 없고, 일부 주민 중에서 산제, 서낭제, 칠성당제를 개인적으로 지냈다고 전해 온다....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에 부엉이처럼 생긴 부엉바위가 있어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부엉바위를 의미하는 휴암리(鵂巖里)라는 명칭이 확인된다. 후에 ‘부엉이 휴(鵂)’자가 ‘쉴 휴(休)’자로 바뀐 것 같다.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도 부흐산[鵂...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들 가운데 볏섬 크기 정도의 커다란 검은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검은돌, 거문들, 흑석 등으로 불렸다고 전하지만, 농지 정리 작업 과정에서 없어져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일설에는 대황2리 마을 바닷가에 있는 검은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흑석리(黑石里),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