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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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寧學校 |
영어음역 | Seoryeonghakgyo |
영어의미역 | Seoryeong School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관아문길 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변천]
서산의 근대 교육 역사에서 풍전신숙(豊田新塾)과 서령학교(瑞寧學校)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풍전신숙은 1907년(순종 1) 당시 대지주 한동벽 등이 서산 읍내에 설립한 학교인데, 1908년(순종 2) 서령학교가 설립되면서 이에 흡수 통합되었다. 『서산군지』에 따르면, 서령학교는 당시 서산군수였던 박승준(朴承俊)과 군내 유지 서병언(徐丙彦)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창립 당시의 위치는 일제 강점기 여자 잠업 견습소가 있었던 관청 건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학교 설립에 참여한 서산 지역 유력자 및 조달 액수는 윤정학(尹情學) 100원, 김재일(金在一)·이명구(李命求)·유태근(柳泰根)·조사현(趙士顯)·한달원(韓達源) 50원, 조동연(趙東淵)·유익환(柳益煥)·한택원(韓宅源) 30원, 김사국(金思國) 40원, 지동욱(池東旭) 20원, 유재근(柳在根)·심의익(沈宜益)·안재호(安載瑚)·성면기(成冕基) 10원, 남두희(南斗熈)·박두병(朴斗秉)·류상희(柳相熙)·임학래(林鶴來)·박용섭(朴容燮) 20환, 최호창(崔鎬昌)·정동호(鄭東鎬) 10환 등이었다.
서령학교는 1910년(순종 4) 3월경 한인과 일인 학생들 간의 충돌 사건과 더불어 경찰의 탄압 등으로 자연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10년 4월 17일자 기사에는, 서령학교 학생 1명이 학교 밖에서 놀다가 거류 일본인 아동에게 얻어맞은 사건을 계기로 한일 청소년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 일본인 순사가 사건에 개입하여 서령학교 교사 김동여(金東汝)를 무수히 구타한 뒤 체포하였다는 사실, 이 광경을 직접 지켜본 서령학교 학생들이 항의 표시로 모두 퇴학하여 등교하지 않자 학교가 ‘자연 폐지’되었다는 사실 등이 서술되어 있다.
[교육 활동]
서령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고등과, 심상과(尋常科) 2개 학과를 설치하고 35명의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개항기 사립 학교들은 일어와 한문은 물론이고, 경제·법률·측량 등 고등 과정의 교과목들도 소화하였다. 설립 당시 서령학교 운영의 중심인물은 후원자 이기상(李基祥), 명예 교수 이철승(李喆承), 이병재(李秉在), 이용의(李容儀) 등이었는데, 이들은 당시 서산 지역의 대지주이자 유력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