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술궂은 노인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207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목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3년 -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 『시흥의 전통문화』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0년 -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군자동 군자봉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6년 -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 『시흥시 군자동지』에 「군자봉과 유씨 집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
관련 지명 군자봉 -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심술궂은 노인|종의 아들
모티프 유형 피지배 계층의 사회 신분적 모순에 대한 저항 의지

[정의]

경기도 시흥시 군자봉과 얽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군자봉과 관련된 이야기로는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군자동의 한 마을에 유씨(柳氏) 집안 중 모진 노인이 자기 종을 모질게 다루다가 매질로 죽게 한 후, 그 종의 아들에게 복수를 당해 집안이 망한다는 내용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3년 시흥군에서 편찬한 『시흥의 전통문화』에는 군자봉에 얽힌 유래를 다루면서 '심술궂은 노인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매 맞아 죽은 종과 그의 아들, 그리고 때려서 숨지게 한 유씨 가문의 모진 노인이 등장한다. 이렇게 집주인과 종의 신분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의 배경은 1894년 갑오경장 이전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갑오경장 이후는 양반과 상민 또는 천민 등의 신분 구조가 타파되기 때문이다. 2000년 시흥시와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편찬한 지표 조사 보고서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는 같은 내용이 「군자동 군자봉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2016년 시흥시 군자동에서 편찬한 『시흥시 군자동지』에는 「군자봉과 유씨 집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군자동의 한 마을에 유씨 집안이 있어 14형제를 이루면서 조정에 진출하여 큰 벼슬로 권세를 누렸다. 유씨 집안에는 유독 심술궂은 노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종에게 매질을 심하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종에게는 16살 먹은 아들이 있었다. 종의 아들은 그 광경을 목격한 뒤, 거지로 전전하다가 강원도 금강산의 깊은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묶게 된다. 어느 날 그 절의 스님이 종의 아들을 불러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 종의 아들은 “지술(地術)을 배워 지관(地官)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스님에게 지술을 배운 종의 아들은 자기 동네로 돌아왔지만 세월이 흘러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조상 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 자리에는 종을 죽게 만든 노인도 있었는데, 말하던 도중에 종의 아들은 말머리를 돌려 유씨네 조상 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유씨의 조상 묘가 명당인 것은 틀림없는데, 군자봉 산봉우리가 석 자 세 치만 낮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도비[거북비]를 산소 쪽으로 10자 끌어올리고 산소 옆의 벌바위를 깨뜨려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종의 아들이 말한 대로, 신도비를 10자 위로 끌어올리자 거북의 발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벌바위를 깨뜨리자 왕벌 두 마리가 그 종의 아들이 떠난 곳으로 날아갔다. 그 종의 아들은 용가마[무쇠솥]를 머리에 뒤집어썼는데, 왕벌 두 마리가 그의 머리를 쏘다가 이내 기진해서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종의 아들은 김포나루를 건너 사라졌고, 지금의 군자봉은 예전보다 석 자 세 치나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고 하며, 묘비에 있던 신도비도 산 아래에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군자동 군자봉 전설」의 내용도 이와 비슷하다. 옛날 안산군[지금의 시흥시 군자동] 지역에서 권세가 담당하였던 유씨 종가에 심술궂은 유씨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성미도 포악하여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집안의 종들도 못살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종을 심하게 매질하여 숨지게 하였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종의 아들은 집을 나가 금강산의 어느 절에 들어가 지술을 익혀 10년 후 유능한 지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씨 노인에게 군자봉의 높이를 3자 3치만 낮추면 더욱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욕심 많은 유씨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지관은 다시 산소 밑에 있는 신도비를 위로 10자만 끌어올리라고 말하고는 마을을 떠났다.

유씨 노인이 신도비를 끌어올리자 받침이었던 거북의 발에서 선혈이 쏟아지며 왕벌 두 마리가 바위 틈에서 나와 지관이 간 쪽을 향하여 날아갔다. 지관은 그때 무쇠솥을 쓰고 있었는데 왕벌 두 마리가 날아와 솥을 쏘다 기진맥진하여 죽어 버리자 지관은 솥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뒤 유씨 집안은 가세가 차츰 기울어 마침내는 폐가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실존 인물인 유잠(柳潛)[1509~1576] 가문의 일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 자손들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하여 크게 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군자봉과 유씨 집안」의 내용도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 「군자동 군자봉 전설」과 같다.

[모티프 분석]

「심술궂은 노인 이야기」의 모티프는 세 가지 점으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는 양반 계층인 노인이 천민 계층인 종을 죽였다는 점이고, 둘째는 죽은 종의 아들이 고난을 받다가 불교에 귀의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그 종의 아들이 풍수에 뛰어나고 도력(道力)을 갖춰서 양반 계층인 유씨 일가를 징계한다는 점이다.

첫째 사건의 핵심은 양반과 상민 또는 천민이라고 하는 유교 신분 질서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드러나는 반인륜적 악행이 살인 사건으로 표출된다. 둘째는 영웅 설화의 고난 모티프에서 보이는 것처럼, 죽은 종의 아들이 비렁뱅이로 돌아다니면서 고통을 받았고 절에 들어가 천한 일을 하면서 인정을 받아 고승으로부터 도력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이 도술은 지술에 관한 능력과 왕벌이 자기를 공격해 올 것을 알았고 무쇠솥을 뒤집어쓰고 방비한 점에서 드러난다. 셋째는 사회 신분적인 모순에 대한 자각과 실천으로, 지배 계층에 대한 피지배 계층의 저항 의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저항 의지를 관철시킨 방법은 풍수적인 단맥(斷脈)의 방책이었다. 그 방책의 한가운데 군자봉이 자리하고 있다.

군자봉에는 조선 전기부터 성황사가 있었고 오늘날까지 군자동 일대는 물론이고 지금의 수원시나 서울 영등포 지역에까지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방책은 유씨 문중을 몰락하게 만들기 위해서인데, 유씨 문중의 세력은 바로 그 영험한 군자산군자봉을 석 자 세 치 낮출 정도로 교만하고 건재해서 결국 군자봉을 건드려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군자봉 전설의 함의(含意)는 피지배 계층의 사회 신분적 모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풍수나 군자봉에 대한 신앙의 위력을 통해 실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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