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을 쏘아 명당터를 맞힌 원씨 가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223
한자 -名堂-原氏家門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8년 - 「활을 쏘아 명당터를 맞힌 원씨 가문」 『시흥군지』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0년 - 「활을 쏘아 명당터를 맞힌 원씨 가문」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
관련 지명 원성모 묘 -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산119-1 지도보기
성격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원성모
모티프 유형 무덤 터를 맞힌 화살

[정의]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무에 있는 원씨 가문 산소에 얽힌 이야기.

[개설]

원씨 일가의 조상인 원성모(元成模)[1569~1636]가 덕물도(德勿島)[지금의 옥구도]에서 활을 쏘자 배나루 산 중턱까지 날아와 화살이 떨어진 곳에 묘를 쓰니 집안이 번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채록/수집 상황]

「활을 쏘아 명당터를 맞힌 원씨 가문」 이야기는 1988년 시흥군에서 편찬한 『시흥군지』, 2000년 시흥시와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편찬한 『시흥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예전에 무슨 난리가 나 당시 무장이었던 원성모가 군사를 이끌고 덕물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고향의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화살 끝에 매어 덕물도에서 배나루를 향해 쏘자 배나루까지 날아와 산 중턱에 닿았다고 한다. 난리가 끝나고 원성모는 무사히 가족에게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원성모는 할아버지가 되어 그때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화살이 떨어졌던 곳에 묘를 쓰라고 일렀다. 그가 세상을 뜨자, 가족들은 유언대로 그 자리에 묘를 썼고, 그 후 집안이 융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사실 원성모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출병하여 사현(沙峴)[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청나라 군사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정왕산을 점거하여 진(陣)을 쳤으며, 군율을 엄히 하여 덕물도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움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자 큰아들인 원승길(元升吉)과 막내아들인 원이길(元飴吉)이 합세하여 3일간 혈전 끝에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과부적으로 기력이 떨어지고 무기도 바닥이 나는 등 싸움의 형세가 계속 불리해져 삼부자가 같은 날 순절하였다.

그후 352년이 경과한 1988년 이곳 일대가 시화국가산업단지[시흥공단] 토취(土取) 구역으로 편입되어 묘를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후손들은 얼굴의 형태며 수염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인 조상의 유해를 보았다. 또한 당시 전투에 입었던 옷들이 하나도 변색되지 않았고 원성모가 칼에 맞아 순절한 핏자국이 옷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무덤의 주인인 원성모가 활을 쏘아 자신이 묻힐 명당을 지정하여 집안이 융성하게 되었다는 무덤 터에 관한 전설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타 지역에서도 보면 강원도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시신이 묻힐 곳을 찾던 중 노루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고 정했다거나, 정몽주(鄭夢周)의 상여가 고향인 경상도 영일로 가던 중 경기도 용인에서 움직이지 않고 상여 위에 걸친 천이 날아가서 멈춘 자리에 묘지를 정했다는 등 묘지를 모티프로 한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