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3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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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屯田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대균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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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리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4.49㎢ |
가구수 | 40가구 |
인구[남/여] | 70명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둔전리(屯田里)는 영광정(迎狂亭), 대학암, 어암 서원(魚岩書院), 훈몽재(訓蒙齋) 등이 있는 역사적인 발자취를 간직한 마을이다.
[명칭 유래]
976년(고려 경종 1) 군사 훈련장 부근 병사들의 막사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고 병사들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전답이 있는 곳이라서 둔전(屯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둔전리는 어암(魚岩), 봉선(鳳仙), 모래등, 사기점, 송정장, 원둔전으로 이루어지는데, 상치등면(上置等面)에 속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쌍치면에 편입되었다. 상치등방 때부터 방 소재지의 주변 마을로 일찍 발전한 둔전리는 시산리에 물류 치등소가 있을 때 관리가 주재했고, 일제 강점기 초까지 국가 전매품의 반출을 단속한 곳이었다고 전한다.
[자연 환경]
둔전리는 북쪽으로 시산리, 동쪽으로 도고리, 남쪽으로 복흥면 하리, 서쪽으로 복흥면 서마리와 경계를 이룬다. 추령천을 중심으로 무리봉 연맥의 원둔전과 장군봉 연맥의 어암과 점암 마을이 마주보고 있다. 백방산 아래 추령천 변에 대학암(大學巖)이 있다. 현재도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조희문, 양자징 등의 제자들에게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을 강의했다고 전한다. 바위에는 그의 문하생이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의 친필로 ‘대학암(大學巖)’이 암각되어 있다. 추령천이 복흥면 석보리에서 감입 곡류하여 오다 둔전리 앞에서 완만하게 되니 땅이 기름지고 산천이 아름답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둔전리의 면적은 4.49㎢이며, 인구는 40가구, 70명이다. 대부분 주민이 고추와 블루베리, 복분자 등 고소득 작물을 재배하며 생활하고 있다. 맑은 물이 전답에 감로수 역할을 해주는 둔전리는 밭은 물론 논농사가 잘 된다.
둔전리는 인조(仁祖)의 스승인 대학자 김인후가 어암에 낙향하여 훈몽재를 세워 후학을 가르치며 송정자(松亭子)를 짓고 전국의 대유들과 교분을 나누던 곳으로, 마을 뒤에 유허비가 있으며 주변에도 이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훈몽재 앞 대학암이나 정철답 등이 그것이다. 어암 서원은 1827년(순조 27) 김인후, 이이(李珥), 정철, 김시서(金時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김인후가 강학하던 훈몽재 옆에 세워졌다. 그러나 1876년(고종 13)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고 6·25 전쟁으로 훈몽재마저 소실되어 버렸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에는 사우(祠宇), 내신문(內神門), 훈몽재, 동재(東齋), 서재(西齋), 전사청(典祀廳), 고사(雇舍), 대문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시산리에서 어암 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둔전교 못 미쳐 기룡암(騎龍巖) 인근 냇가 옆에 영광정이 위치한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금옹(錦翁) 김원중(金源中)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 7명과 함께 광인 행세를 하면서 은밀하게 영광정을 근거지로 의병을 모집하고 물자를 준비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1년 6월 독립 운동의 뜻을 추앙하고자 정자를 세우고 처마 끝에 태극 팔괘를 새기고 영광정이라 하였다. 6·25 전쟁 때 쌍치면 관내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는데 유일하게 영광정은 소실되지 않았다. 건물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다.
둔전리 동구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들독 놀이에 쓰인 돌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달걀 모양처럼 둥글면서 약간 긴 돌은 큰 것은 130근[78㎏], 작은 것은 80근[48㎏] 정도 나간다. 들독 놀이는 한국식 역도로 농경 사회에 쓰였던 중요한 민속자료다. 칠석이나 백중 날에 청장년들이 한 해 농사의 피로를 풀기 위해 풍물을 치면서 크고 작은 들돌을 들어 올리며 힘을 평가하고 즐기는 놀이로서, 옛날 머슴들의 새경을 정하는 구실도 하였다. 들독 놀이는 농악, 줄다리기와 더불어 단조로운 농경 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면서 즐기는 민속놀이의 하나로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농사일에 생기를 불어넣는 활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