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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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邑南里- |
영어의미역 | Petroglyph of Eumnam-ri |
이칭/별칭 | 토일리 바위그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이희돈 |
성격 | 바위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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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청동기시대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바위그림.
[위치]
읍남리 바위그림은 읍남리 토일천의 남쪽 옆 정상부에 위치한다. 울진읍 토일리를 지나 상토일 방향으로 500m 가량 서북향으로 가다가 내를 건너 서남쪽 바릿재 옛길 방향으로 접어들면 야트막한 산봉우리 밑자락에 상여를 보관하는 곳집이 있다. 곳집의 형상은 나무 원통과 흙벽을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울진 지역에서 현재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 곳집 왼쪽에 흥해배씨 묘가 있으며, 바로 곁에 바위그림이 발견된 봉우리로 오르는 길이 드러나 있다. 봉우리는 삿갓 모양의 나지막한 봉우리로 바깥에서 보면 그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나, 봉우리 정상에 오르면 뒤쪽의 산자락에 안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정상은 온통 바위덩이로 형성되어 있으며, 오랜 세월 풍화 작용에 의해 봉우리 주변으로 커다란 바위덩이가 그대로 노출돼 있어 산봉우리 전체가 거대한 바위덩이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봉우리의 남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1m 가량의 장방형의 암석이 층층이 쌓여 있어 옛 성곽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서북쪽은 커다란 바위덩이가 낭떠러지를 형성해 단애를 이루고 있다. 정북향쪽인 곳집 뒤쪽은 커다란 바위벽을 형성하고 있다. 바위그림이 발견된 지점에서 정북 방향으로는 토일리 고분군이 위치한다.
[형태]
바위그림은 2개의 바위에 있다. 바위그림이 드러난 부위는 과거 여러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으며, 상단은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경우 크기는 남북 15m, 동서 10m 정도이다. 바위는 북쪽이 남쪽에 비해 더 높으며, 동쪽이 서쪽에 비해 약간 낮은 상태다.
큰 바위는 크기가 340×130㎝이고, 상면에는 37개의 성혈이 파여 있다. 또 후대에 판 것으로 보이는 ‘일(日)’자 1개가 각자되어 있다. 바위에서 서쪽으로 350㎝ 떨어진 지점에 있는 260×130㎝ 크기의 작은 바위의 상면에도 10개의 성혈이 파여 있다. 성혈의 크기는 지름 4~12㎝, 깊이 17㎝로 다양하다.
[현황]
봉우리 정상부에 있는 2개의 큰 바위는 하부가 묻혀 있어 상면만 노출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읍남리 바위그림은 일반적인 바위그림 유적으로 고대 사회의 제천의례를 행한 성소로서의 상징체계와 그 부산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읍남리 바위그림은 울주나 영일 칠포리의 바위그림과는 달리 강가나 바위벽에 새겨지지 않고 산봉우리 정상에 새겨진 것으로 그 규모는 안동 한들바위그림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한들바위그림의 연대는 철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데, 읍남리 바위그림도 그 형태로 보아 이와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우진야현의 명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발악[일명 악발, 바리재]’과 연관시켜 볼 때, 이 지점은 울진의 선사시대 또는 고대 사회 당시 제천의식이 거행된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신단수’와 ‘솟대’의 개념이 복합된 ‘소도’로도 추정할 수 있다.
읍남리 바위그림은 울진의 선사시대 고분군으로 확인된 토일리 고분군과 인접해 있으며, 기록에 있는 ‘발악’과 관련되는 등 중요한 역사적 연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읍남리 바위그림은 베일에 싸인 동해 북부 지역 고대사의 또 다른 부분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