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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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鬱陵島原住民 |
영어의미역 | The Natives of Ulleungd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우산국 시대 울릉도에 살았던 울릉도민.
[개설]
우산국(于山國)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3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 이사부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우산국이 신라에 편입되어 멸망한 기록으로 우산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울릉도 원주민의 출자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연원]
울릉도 남서동(南西洞) 고분군에서는 성혈이 새겨진 고인돌 개석과 유사한 큰 바위가 발견되었다. 또한 현포동(玄圃洞)에서는 무문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 무문 토기의 기원은 본토의 철기시대 전기 말경, 아무리 늦어도 기원 전후의 전형적인 무문 토기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울릉도에 주민이 들어온 최초의 시기는 기원 전후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온다. 245년 옥저(沃沮)의 국인(國人)이 동쪽 섬에서 표류하다가 사람들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울릉도 원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릉도 원주민들은 옥저 사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고 해마다 7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렸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울릉도에 우산국이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천]
울릉도에 산재해 있는 많은 고분들은 대개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 정벌 이후인 6세기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한 김원룡(金元龍)은 “낙동강 동안의 삼국시대 석곽묘와 주체 구조에서 유사하며, 신라 중심지의 묘제가 아닌 가야 지방의 묘제와 연결된다. 이 사실은 우산국이나 주민의 출자가 신라계가 아니라 가야계라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박물관 보고자들은 “신라 묘제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울릉도의 실정에 맞게 변형된 것으로 6세기 중엽 이후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울릉도식 고분이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축조되어, 그 양상으로 보아 울릉도에 진출한 신라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우산국의 토착 지배층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토착적인 발전을 거쳤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998년 영남대학교의 조사에서는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의 한계로 고분 축조 집단이 토착민인지 이주민인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다만 고분의 구조나 형식이 육지와 어떤 식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토착민들이 외부의 영향으로 발전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육지에서 울릉도식 고분과 유사한 고분 형태와 토기를 가지고 이주한 사람들이 고분을 축조하면서 섬 안에서의 독특한 생태적 조건에 적응한 산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울릉도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울릉도 원주민의 출자 역시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증왕 때 신라에 편입된 이후에도 우산국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신라에 귀복함으로써 신라의 인적·물적 지원 하에 더욱 더 강력한 해상력을 확보하여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독자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