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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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최범호 |
[정의]
고대시기 전라북도 완주군의 역사와 문화.
[개설]
전라북도 완주 지역은 마한 일부였으며 가까이에 한의 중심지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대 완주의 모습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삼한에는 마한 54국, 진한, 변한에는 각각 12국 등 모두 78개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 원지국(爰池國)이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 있었다고 비정하였는데, 이 역시 원(爰)과 완(完)의 음이 가깝다는 견해이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마한시대 완주에 어느 나라가 있었는지 역시 불분명하다. 삼한 다음 시대인 삼국시대에 전라북도는 백제의 영토였는데, 언제부터 백제의 영토가 되었는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에 편제되는 과정은 자세하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에 지금 전라북도가 완산과 남원 외에 8군 32현으로 구획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 지리지의 기록을 기준으로 그 이름만을 나열한 것이어서, 이것으로 백제시대의 편제는 확실하지 않다. 한성 시대[B. C. 18~475]의 백제의 지방행정제도는 알 수 없으며, 웅진 시대[475~538]에는 수도 고마성(固麻城)[웅진, 지금 충청남도 공주시] 외 전국에 22개 담로(擔魯)가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편제는 알 수 없다. 사비 시대[538~660]에는 5부(部)[수도]와 5방(方)[지방]제가 실시되었는데, 지금 전라북도 완주 지역의 남부에는 중방(中方) 고사성(古沙城)[고부, 전라북도 정읍시], 북부는 동방(東方) 득안성(得安城)[은진,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관내로 짐작된다. 다만 백제시대의 완주에는 큰 읍이 발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그리 중요시되지 못했으며 아직 전라북도 지방의 중심지로 되지 못했다.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완주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완산(完山)[전라북도 전주시 노송동], 두이현(豆伊縣)[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우소저현(于召渚縣)[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고산현(高山縣)[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현내리], 지벌지현(只伐只縣)[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운제리]이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 기록은 757년(경덕왕 16) 이후 당시 신라의 지방행정제도를 기준으로, 각 주, 군, 현의 소위 백제 때 지명을 나열해 놓은 지명표에 불과하므로 백제의 지방행정제도의 편제나 그 구역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뒤 당은 웅진(熊津)[충청남도 공주시], 마한(馬韓)[충청남도 부여군 또는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로 추정], 동명(東明)[충청남도 공주시 북쪽], 금련(金連)[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충청남도 연기 지역으로 추정], 덕안(德安)[은진,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의 5도독부를 두어 각 주, 현을 관할하게 하고 백제인 중에서 도독, 자사, 현령을 임명했으며 웅진도독만은 중국인을 파견해서 통할케 했다고 한다. 이중에서 완주 지역은 북부 일부가 당의 관할 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이 때 백제의 행정구역이 1도독부, 7주, 51현으로 개편되었다고 한다. 그 중 완주 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노산주(魯山州)로서 그 밑에 노산, 당산(唐山), 순지(淳遲), 지모(支牟), 오잠(烏蠶), 아조(阿錯)의 6현이 있었다. 노산주 6현 중 노산은 본래 감물아(甘勿阿)로서 현재 함열이다. 당산은 금구, 순지는 이성(伊城), 지모는 금마이다. 오잠은 불분명하나 옥구에 비정된다. 아조는 본래 원촌(源村)이라고 했는데 잘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완주[전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전라북도 익산시,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및 전라북도 김제시의 일부가 노산주의 관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완주 지역에는 백제 말기까지 큰 고을은 없었으나 이미 전라북도 전주시,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봉동읍·고산면·화산면 등지에 작은 마을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제시대의 완산 지역은 행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전라북도 지역에서 전라북도 익산시[옛 지명 금마], 전라북도 김제시,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전라북도 정읍시 등에 비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으로 백제시대의 이름마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완주 지역이 백제시대에는 크게 부각이 되지 못한 지역이었다가,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이나 나당전쟁에서 당군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부각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의 여파로 인해 663년(문무왕 3) 말부터 당의 세력권이었으며, 670(문무왕 10) 이후 나당전쟁과정에서 완주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가 전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완산주서(完山州誓)가 두어진 672년(문무왕 12)의 일이며, 당시에 전주 일대는 거열주[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일대]의 관할이었는데, 685년(신문왕 5)에 거열주를 전주로 옮겨와 완산주서(完山州誓)와 합쳐 완산주를 설치하고, 완산정(完山停)을 편재했다. 이로써 신라에서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면서 전라북도 지역의 지방 거점도시로서 부각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완산주를 전주로 고쳐 9주 가운데 전라북도 지역을 통할하는 중심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완산주에는 웅천주, 무진주와 달리 완산정과 완산주서를 설치한 것은 정치적 중심지였던 웅천주 지역과 지리적으로 불편한 무진주 지역보다 완산주에 군사적 비중을 두어, 이를 중심으로 옛 백제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