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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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舊參禮驛 |
영어공식명칭 | Samnyeyeok(Traffic rou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장순순 |
폐지 시기/일시 | 1896년 2월 - 구 삼례역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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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할 지역 | 구 삼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
[정의]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전라북도 완주군에 설치되었던 교통 편의시설.
[개설]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의 지명에서 삼례도찰방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삼례읍, 삼례리, 찰방다리와 그 옆에 위치한 여수코빼기[본래 지명은 재실뜸인데, 한자명으로 고칠 때 태평리가 됨]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삼례역이 있었던 오백조면(五百條面)이 몇 차례의 개편을 거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옛 삼례역의 이름을 따서 삼례면이 되었다. 찰방다리는 삼례역을 오고가는 통행자를 검문하는 곳이었으며, 찰방다리 옆 동산은 여우의 코를 닮아서 생긴 지명이기도 하지만, 검문과정에서 숨기고 싶은 물건을 잘 찾아낸다고 해서 ‘여수코빼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관련 기록]
삼례역(參禮驛)은 『고려사』 권94, 「지채문 열전」에서 “고려 현종대 거란의 침입을 받아 개경이 위험해지자 나주로 피난하면서 1011년 1월 8일 삼례역에 도착했다”라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다. 『고려사』 권82, 「병지 참역」에서는 고려시대 22개 역로 중 하나인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삼례역이 편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국이상국집』에서 이규보가 서울로 가는 길에 지은 시에서 삼례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실록지리지』 권151, 「지리지」 전라도 조에서 삼례역이 속한 삼례도와 그 소속역에 대해 적혀 있다. 『세조실록』에서는 병조의 건의로 역로를 정비하면서 삼례도 찰방(參禮道 察訪)으로 정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편찬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전라도 보유편」, 『호남역지』, 『호남읍지』 등에는 삼례역의 위치, 관할하는 역, 역에 배치되는 인원과 말과 토지, 역의 운영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용]
고려시대 22개 역로에서 삼례역은 전라북도 전주시를 중심으로 전라북도 일대와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소속된 21개 역 중 하나로, 전라도에서 서울을 오고가는 길목 역할을 하였다. 고려 현종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나주로 피난하던 중에 삼례역에 도착했다는 기록과, 『동국이상국집』에서 이규보는 서울로 가는 중에 삼례역에서 말을 갈아타면서 시를 지었다는 내용은 삼례역이 서울과 전라도를 오고가는 길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도 삼례역은 전라도의 주요 교통로가 되었다. 세종 대와 세조 대에 몇 차례의 역제 개편을 통해 삼례역은 삼례도 찰방으로 13개 역[삼례역, 반석역(半石驛), 앵곡역(鶯谷驛), 오원역(烏原驛), 갈담역(葛蕈驛), 소안역(蘇安驛), 촌곡역(寸谷驛), 양재역(良才驛), 거산역(居山驛), 천원역(川原驛), 영원역(瀛原驛), 부흥역(扶興驛), 내재역(內才驛)]을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을 연결하는 9개 대로에서 한양에서 통영으로 가는 중간에 삼례역을 거치며, 또 한양에서 제주로 가는 길목에도 삼례역을 지나야 할 만큼 삼례역은 전라도로 진입하는 초입이었다. 인조대 문신 장유도 “삼례역은 호남 지역의 첫번째 인후(咽喉)와 같은 곳”이며 전라도로 들어갈 때에는 모두 삼례역을 경유한다고 하였다.
『여지도서』 「전라도 보유편」 완산지에서 삼례역은 전주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며 삼례역 찰방은 문관으로 종6품 1인, 역리(驛吏) 20명, 번인(番人) 101명, 역노(驛奴) 18명, 역비(驛婢) 18명, 보인(保人) 382명, 보솔(保率) 191명, 일수(日守) 267명, 민호(民戶) 204호, 말 15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삼례역의 운영을 위해 위답(位畓) 39섬 17두락, 복호(復戶) 470결의 토지가 배정되었다. 삼례역 내에는 찰방이 업무를 보거나 취침을 할 수 있는 덕류당(德流堂)과 그 앞으로 아전들이 업무를 보기 위한 성청(星廳)이 있고, 그 주위에는 말을 사육하기 위한 건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덕류당의 왼쪽으로 마신당(馬神堂)이 있는데, 삼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던 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신당으로 대부분의 역이 갖추고 있었다. 삼례역 찰방은 삼례도에 소속된 여러 역들을 관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행정과 역리, 역마를 정기적으로 점고(點考)하고, 말의 비척에 따라 상벌을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역의 고유 기능인 관찰사, 봉명사신, 외관의 공적 행차에 찰방이 함께 배행하고, 역마를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관할하는 역리, 역노비, 관군, 일수, 보솔, 보인, 번인 등을 관리하고, 역에서 관리하는 환곡의 관리도 찰방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변천]
삼례역은 1895년 6월 1일 한성과 인천 등 24개소에 농상공부 대신의 관리에 속하는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여 근대적 우편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역원이 폐지되었는데, 삼례역도 1896년 2월에 폐지되었다. 그 뒤 덕류당은 1921년에 삼례학교조합 명의로 구입되어 일본인들을 위한 소학교로 운영되었다가, 1964년에 삼례동부교회가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삼례역 앞에 있었던 선정비들은 삼례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의의와 평가]
삼례에는 “이리로 가면 이리, 저리로 가면 전주, 그리로 가면 금마, 고리로 가면 고산”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는 삼례역이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례역은 수도에서 전라도를 들고나가는 주요 교통로로서 이 시기 사람과 물자의 이동, 상업의 발달, 지역문화의 형성과 교류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