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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10
한자 檜岩洞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85년 10월 1일연표보기 -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2003년 10월 19일연표보기 -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에서 양주시 회천4동 관할의 회암동으로 개편
법정동 회암동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지도보기
성격 법정동
가구수 514가구
인구(남,여) 1,152명[남자 648명, 여자 504명]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천4동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회암동(檜岩洞)의 옛 이름인 회암리의 땅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옛 회암면 지역에 회암사(檜巖寺)가 있어 회암골·회암동·회암으로 불렸다는 설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에 따르면 ‘회암’이라는 땅 이름은 회암사라는 사찰의 이름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회암사의 창건 시기가 분명하지 않아 연대를 확정하기 힘들다. 다만 적어도 고려 후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옛날에 전나무가 많았고 천보산이 응결된 암석으로 이루어져 회암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회암리라는 땅 이름은 다른 지역과 달리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된 명칭이었다. 회암리는 18세기 후반에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서는 이곳을 회암면에 소재한 내회암리로 소개하였다. 당시 회암면은 내회암리와 말한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회천읍의 전신인 회암 혹은 회암면이 고려 말기부터 나오므로, 회암리라는 땅 이름의 기원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회암은 이미 『고려사(高麗史)』의 우왕(禑王) 2년 기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나온다. 회암면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1757]·『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1767~1776]·『동국여도(東國輿圖)』[1801~1822]·『청구도(靑邱圖)』[1834]·『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1842]·『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대동지지(大東地志)』[1864]·『양주목읍지』[1871]·『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양주군읍지(楊州郡邑誌)』[1899]·『양주읍지(楊州邑誌)』[1899]·『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이르기까지 확인된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기존의 회암면 내회암리 및 회암면 송현리·모정리의 일부를 합하여 회암리로 통합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회천면회천읍으로 승격되어 회천읍 회암리가 되었다가,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되면서 양주시 회천4동 관할의 회암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 환경]

북쪽에 칠봉산천보산 자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 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평지에 회암천이 남류하고 있다.

[현황]

회암동은 양주시 회천4동의 북쪽에 위치한다. 2010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총 514가구에 1,152명[남자 648명, 여자 50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회암1통과 회암2통의 2개 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 마을로는 가운데말·골말·공수골·노촌말·못말[연동(淵洞)]·샘말·서재말[서재동(書齋洞)]·안회암[내회암동(內檜岩洞)] 등이 있다. 현재 회암동에는 천보산과 조선 시대 최대의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지가 있어 수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으며, 조선 후기 대표적인 저항 시인인 김삿갓이 머물렀던 터가 있어 양주시 문화 관광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동쪽은 포천시 포천동, 서쪽은 양주시 회천1동의 덕정동, 남쪽은 회천4동의 옥정동·율정동, 북쪽은 회천1동의 봉양동 및 동두천시 탑동과 접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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