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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65
한자 買省郡
이칭/별칭 매성,창화군,마홀,매성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김선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475년연표보기 - 매성군 설치[추정]
개정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매성군에서 내소군으로 개정
관할 지역 매성군 - 경기도 양주시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구려의 군.

[개설]

본래 지금의 양주시 일대는 고구려에 속하였다가 백제 근초고왕이 취한 이후 백제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다시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다시 고구려 군현이 되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7 지리지에서는 매성군이라 칭하고 있으나 같은 지역을 놓고 『삼국사기』 권35 지리2 신라 한주 내소군조 및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10 문무왕 8년 인용 부분에서는 매성현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매성군을 매성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딸린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견주(見州)에 대한 설명에서 본래 백제 매성군인데 마홀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성군, 혹은 매성현은 고구려 군현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양주시 양주2동[옛 주내면회천읍 일대]을 포함한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구려는 475년(장수왕 63) 9월 백제의 도성인 한성 등을 함락시켜 남진을 완성한 뒤에 지금의 양주시 일대를 지배하게 되면서 행정적·군사적 목적으로 군현 편제를 단행하였는데, 이때 매성군[혹은 매성현]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권11, 경기 양주목]에 전하는 양주목 건치 연혁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즉, 본래 고구려 매성군인데, 신라 경덕왕 대에 내소군(來蘇郡)이라 고쳤다. 고려 시대에 들어 947년(정종 2)에 견주군(見州郡)[창화군(昌化郡)이라고도 함]을 설치하였으며, 1018년(현종 9)에 양주(楊州)[지금의 서울]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 1394년(태조 3) 수도를 양주 관내인 한양으로 옮기게 되자 1397년(태조 6)에 양주부견주의 옛터인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로 옮김으로써 이후 양주로 불렸다.

[내용]

5세기 후반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남진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475년 9월에 이르러 백제 도성을 무너뜨리고 한강 유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정복지에 대해서는 한산주를 두고 군현을 편제하였는데, 불곡산, 고장산, 천보산으로 둘러싸이고 중랑천청담천 등 하천이 흐르는 현재의 양주시 양주2동 일대에 매성군[혹은 매성현]을 두어 관할토록 하였다. 그런데 지명의 유래를 보면, ‘매성’의 매는 ‘맷골’, ‘물골’을 의미하였고 홀은 성을 의미하였다 한다. 이를 고려하면 ‘매성’은 물가의 성 혹은 샘과 우물이 있는 수성(水城)을 뜻하였다.

[변천]

진흥왕 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757년(경덕왕 16)에는 내소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초에 이르러서는 양광도견주에 소속되었다. 문종 때에는 남경유수관 양주에 속하였다. 조선 세조 때에 이르러서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의의와 평가]

양주 지역은 한강 유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때 영토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 세력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매소성이 양주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매성군을 포함한 이 지역은 삼국 통일 완성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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