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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76
한자 積城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한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018년연표보기 - 적성현이 장단현의 속현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1062년연표보기 - 적성현이 장단현의 속현에서 개성부의 속현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고려 예종 - 적성현에 감무 설치
개정 시기/일시 1413년연표보기 - 적성현에 현감 설치
개정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한성부 적성군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한성부 적성군에서 연천군 적성면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연천군 적성면에서 파주군에 병합
관할 지역 경기도 양주시 남면
관할 지역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정의]

경기도 양주시 남면과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 설치되었던 고려 및 조선 시대의 현.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강을 끼고 있어 교통상, 군사상의 요지였던 경기도 양주 지역에는 삼국 시대 때부터 토탄성(吐呑城)·아미성(峨嵋城)·육계성(六溪城)·수철성(水鐵城) 등의 많은 성이 있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요지로 인식되었고, 고려 시대에 들어 성이 많다 하여 ‘적성(積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주로 속현 혹은 개성부에 속하였으나 조선 시대인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서는 현감을 둠으로써 독립된 행정 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권56, 지10 지리 왕경 개성부 적성현]에는 본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신라 경덕왕이 중성(重城)으로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1018년(현종 9)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1062년(문종 16)에 내속(來屬)하여 예종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전한다.

또한 감악(紺嶽)에서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로 산 위에 사우(祠宇)가 있어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군이 장단악(長湍嶽)에 이르매 신사(神祠)에 정기와 사마(士馬)가 있는 것 같아 거란군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한 까닭에 수리(修理)를 명하여 신사에 보답하였다. 민간에 전하는 말로 신라 사람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제사하여 산신(山神)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현재의 양주시 남면 일대를 포함한 적성현의 이름은 고려 초에 등장하지만 이미 고구려 때의 칠중성이나 신라 때의 중성이라는 지명에서 나타나듯 성이 많은 곳이었다. 그것은 임진강을 끼고 있는 교통상, 군사상 요지였기 때문이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장단현의 속현이 되었고, 1062년(문종 16)에는 개성부에 속하였으며, 1106년(예종 1)에는 감무를 두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경기좌도로 편제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적성현은 현재 경기도 양주시 남면과 파주시 적성면 일대를 포함한 고려 및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이었다. 개경 및 한양부와 인접한 임진강을 끼고 있어 교통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고, 이에 따라 군현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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