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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78
한자 百濟
이칭/별칭 남부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홍정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기원전 18년 - 온조왕, 양주 지역에서 백제 건국
특기 사항 시기/일시 기원전 6년 - 온조왕, 양주를 떠나 하남위례성으로 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369년연표보기 -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패배
특기 사항 시기/일시 389년연표보기 -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고국원왕을 평양성 전투에서 사살
특기 사항 시기/일시 475년연표보기 - 고구려 장수왕,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임, 한성 백제 멸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550년연표보기 - 백제 성왕, 고구려로부터 양주 지역 수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553년연표보기 - 신라 진흥왕, 고구려를 치고 양주 지역 점령

[정의]

삼국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속했던 한성에 도읍했던 국가.

[개설]

고조선 멸망 이후 양주 지역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다. 마한은 54개국으로 구성된 연맹체였으므로 이 중 양주 지역을 차지한 나라가 어느 나라였는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명 탐색을 통하여 양주 지역이 마한의 고리국(古離國)이었다고 비정한 이병도(李丙燾)의 학설이 그동안 주목되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삼국지(三國志)』의 기리영(騎離營) 전투 기사를 분석하여 대방(帶方)[경기도 북부 및 황해도 일원]과 치열하게 싸웠던 신분고국(臣濆沽國)이 양주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 있게 대두되고 있다.

[백제의 건국과 양주]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를 떠나 남하한 온조(溫祚) 집단은 기원전 18년에 마한 왕이 떼어 준 한수(漢水) 이북 양주 지역에 국가를 세웠는데 마한의 왕은 온조 집단을 나라의 북쪽 변경에 배치하여 말갈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초기 백제가 포로로 잡은 말갈의 추장을 마한에 호송한 것이나 사슴을 잡아 마한 왕에게 헌상하는 등 백제가 마한에 예속된 듯이 보이는 기사와 함께 백제가 마한으로 진출하려 하자 마한 왕이 백제를 견책하며 영토를 할양하여 국가를 세우게 한 은혜를 잊었다고 추궁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그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온조의 최초 건국지인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하여는 그간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지만 방학동설, 불암산설, 불광동설, 의정부 호원동설 등 여러 주장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 아직 그 위치를 확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의정부 민락동 유적 상층부의 백제 촌락 유지와 포천 성동리 백제 촌락 유적, 포천 자작리 집자리 유적, 포천 반월성지 등에 나타나는 다수의 초기 백제 유적과 파주 주월리에서 확인되는 집자리, 육계토성(六溪土城) 등의 초기 백제 관방 시설 등은 양주 지역이 초기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음을 확인하게 한다.

[양주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고구려의 갈등]

기원전 6년(온조 13) 백제는 말갈의 압력에 못 이겨 수도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지만 그 후에도 양주 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말갈의 거듭되는 치열한 전투는 고구려가 양주 지역으로 진출해 이 지역을 장악하기까지 오랜 기간 치열하고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었다. 백제는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저지하는 한편, 389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사살하는 등 고구려를 제압하고 이어 요서로 진출하게 되었다.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고구려는 백제에 복수를 다짐하며 남진 정책을 강화하여 394년과 395년 광개토대왕이 임진강 지역의 전투에 나섰다. 광개토대왕은 한강 하구에 상륙하여 군을 나누어 인천 방향에서 한강을 거슬러 위례성에 접근하는 한편 또 다른 군세로 임진강을 거슬러 한탄나루에 이르고 여기에서 남하하여 백제 수도를 압박하는 양면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 전투로 광개토대왕은 한강 이북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압박하여 마침내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철수하였다.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이때 광개토대왕이 함락한 백제의 58성 중, 각미성(閣彌城)은 한강 하구의 관미성(關彌城), 즉 오두산성, 미사성(彌沙城)은 한탄강 남안의 매초성(買肖城), 즉 지금의 대전리산성, 아단성(阿旦城)은 서울특별시 광진구의 아차산성, 고모루성(古牟婁城)은 포천의 고모리산성, 고리성(古利城)은 양주 지역에 각각 비정되는 바 이를 통하여 광개토대왕이 임진강 하구에서 동두천 입구의 대전리, 포천의 고모리를 거쳐 한강 하구의 광진나루에 이르는 진군로를 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양주 지역 장악과 한성 백제의 멸망]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이후 양주 지역의 지배권 회복을 노리는 백제가 왜와 결탁하여 고구려가 장악한 대방의 옛 땅에 대한 침탈을 거듭하자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여 대대적인 백제에 대한 경략(經略)에 나서 475년 마침내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처형함으로써 493년에 걸치는 한성 백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양주 지역을 포함한 한성 백제 지역의 점령지에 고구려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文周王)[혹은 문주왕(文洲王)]은 남쪽 웅진으로 옮겨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고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동성왕, 무령왕을 비롯한 역대 왕들이 전력을 다하여 고토 회복에 나섰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성왕 대에 이르러 신라, 왜 등 동맹군과 협력하여 다시 한강 유역으로 진출, 550년 양주 지역을 회복하지만 3년 후인 553년 이번에는 신라에 빼앗겨 백제는 결국 양주 지역을 비롯한 옛 한성 백제의 영역을 수복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한성 백제 시절 백제는 양주 지역에 자신들의 행정 구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현재의 사료(史料)나 각종 지지(地誌)에는 고구려가 양주 지역을 장악하면서 여기에 설치한 행정명인 매성현(買省縣)이 나타나고,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한 후에 개정(改定)한 내소군(來蘇郡)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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