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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32
한자 知楊州事
이칭/별칭 지양주군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학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94년연표보기 - 양주군으로 강등하고 지양주사를 둠
개정 시기/일시 1395년연표보기 - 양주군을 양주부로 승격, 지양주사를 양주부사로 승격
성격 관직
품계 종4품

[정의]

조선 초기 경기도 양주를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개설]

양주는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고려 시대에 남경유수관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가 되었다. 한양부는 현재의 서울을 포함하여 교하군·견주·포주·행주·고봉현·봉성현·심악현·풍양현·사천현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이 건국된 뒤 한양부를 도읍으로 정하면서 현재의 서울 지역에 도성이 건설되었다. 1395년 한양부를 고쳐 한성부로 하고, 한양부의 백성들을 견주로 옮기고 이름을 양주군이라 고쳤다. 양주군에는 지양주군사(知楊州郡事), 줄여서 지양주사(知楊州事)가 파견되었다.

[담당 직무]

지양주사는 양주군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48, 지리지 경기 양주도호부]에 의하면, “[고려] 현종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 9년 갑신에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 대동리(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라고 되어 있다.

『태조실록』[권 7, 태조 4년 6월 6일] 기사에 의하면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1395년(태조 4) 양주군이 다시 양주부(楊州府)로 승격됨에 따라 관직도 종4품의 지양주사에서 정4품의 양주부사로 승격되었다. 이후 양주는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로, 1466년(세조 12)에는 다시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어 그 지리적 중요성을 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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