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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500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만용

[정의]

개항기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경기도 양주시의 역사.

[양주의 행정편제 변천]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조선 시대의 지방 제도가 23부, 336군으로 개편되었다. 신관제(新官制)에 의한 23부제가 1895년 6월 23일에 시행됨에 따라 양주는 한성부에 소속되었다. 한성부에 소속된 군은 양주 이외에 한성·광주·적성·포천·영평·가평·연천·고양·파주·교하 등 11개 군이 더 있었다. 23부제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었고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양주는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합병되자 조선총독부 체제로 전환되면서 양주군은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양주군은 조선 왕조 창업 과정에서 그 중심부를 신왕조의 도읍지로 내어 놓고 치소를 옮겨 갔지만, 그 위치가 수도 한양과 인접해 있었던 까닭에 물화가 풍부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한양의 배후 도시로서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나 한일 합병 이후 경성에 가까운 곳과 물화가 모이던 번화한 곳은 모두 고양군에 부속되었고, 동북 산악 지방은 포천과 연천군에 편입되어 양주군은 순수한 농업군으로 변하게 되었다.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지방 제도가 개편되어 양주군은 32면, 343동리로 구성되었다. 이때 지명이 변한 지역을 살펴보면 주내(州內)가 읍내면(邑內面), 진답면(陳沓面)묵은면(默隱面), 자북곡(紫北谷)이 자북면(紫北面), 별비곡(別非谷)이 별비면(別非面), 진대(榛代)가 진대(榛垈), 와곡(瓦谷)이 와공(瓦孔), 미음(美音)이 미음(渼陰), 구지(龜旨)가 구지(九旨)로 바뀌었다.

그 밖에 산내면[갈월리·금동리·지동리·재정리·덕둔리·삼정동·낭자동·승둔리], 청송면[백아리·궁평리·대전리·초성리·장탄리], 신혈면[벽제리·선유동·오금리·지축리·진관내리·진관외리] 등의 명칭이 없어진 대신 초부면(草阜面)이 생겼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06년 9월에 일제 칙령 제49조에 따른 지방 구역 정리의 결과였다. 이때 신혈면은 고양군으로, 산내면청송면은 포천군으로 속하게 되었고, 광주군 초부면이 양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었는데, 경기도는 경성과 인천의 2부와 20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양주는 그 중의 한 군이 되었다. 당시 통폐합으로 행정 구역이 바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읍내면고주내면주내면으로, 천진면·회암면·어등산면 등을 합쳐 회천면이 되었고, 현내면·묵은면·석적면 일부를 합쳐 은현면으로 하였다. 석적면과 광석면을 합해 광적면, 시북면과 둔야면을 합쳐 시둔면으로, 내동면과 별비면은 별내면, 진벌면접동면진접면, 건천면진관면진건면, 하도면상도면을 합쳐 화도면으로, 와공면초부면을 합해 와부면으로 하였다. 1922년 양주군 청사가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 의정부리로 이전하였고, 1938년 시둔면양주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 양주면이 다시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양주군은 총 16면에 148동리로, 호수가 1만 8500호, 인구는 10여 만 명 정도인 전국적으로도 비교적 큰 규모의 지역이었다. 토지는 민유지가 24만 2000반(反)[1반은 1정의 1/10로 약 300평 ], 국유지가 1만여 반이었다. 생산되는 곡물은 주로 쌀, 보리, 콩 등이었고, 특수 작물로 면화, 대마, 연초, 채소류 등이 있었다. 특히 양주 밤은 크고 달아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각 산업에 종사하는 양주군의 인구 분포를 보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90%가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남한에는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양주 지방도 새롭게 개편되었다.

[양주 관련 사법 제도]

조선 시대의 지방 통치 구조는 군현제 하에서 관찰사를 중심으로 한 지방관에게 행정과 사법, 군사에 대한 전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재판권은 지방 관서의 장이나 행정 관리가 담당하여 왔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재판권은 법무아문에 귀속되어 행정관이 재판을 담당하였다. 1895년 3월 법률 제1호로 제정되어 공포된 「재판소 구성법」에서는 2심제를 채택하였다. 제1심 재판소에 지방 재판소와 개항장 재판소를 두었고, 제2심 재판소에 고등 재판소와 순회 재판소를 두었으며, 왕족에 대한 형사 재판을 위하여 특별 법원을 두었다. 양주의 경우는 1896년 8월 15일 법부령 제5호에 의해 한성재판소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1897년 9월 한성 중서(中署) 전평시서(前平市署)에 경기재판소가 설치되자 양주는 이에 속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구로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06년 이사청(理事廳)을 개설하여 영사관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사청 관제의 규정에 따라 양주는 경성에 위치한 경성이사청에서 관할하였다. 그 후 통감부는 1909년 7월 12일 사법권 침탈의 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마저 박탈하였다. 그해 10월에 「통감부 재판소령」이 공포되어 모든 재판소가 통감부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양주의 경우 구재판소(區裁判所)가 설치되어 양주·고양·영평·포천·가평 지역을 관할하였다.

[교육 기관과 사회단체]

교육 기관에 대해 살펴보면 1899년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설립된 양주공립소학교(楊州公立小學校)가 1919년 의정부로 이전하였고, 1908년에 설립된 양주북내학교(楊州北內學校)가 1919년 북내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1927년 당시 양주에는 보통학교 8개, 실업 학교 1개, 사립 학교 3개, 서당 82개 등이 있었다.

1920년대 이후 양주에는 농민 단체·노동자 단체·청년 단체·소년 단체 등 많은 사회단체가 결성되었다. 단체로는 양주천도교청년회(楊州天道敎靑年會), 의정부청년회(議政府靑年會), 유양엠윗청년회[維楊엠윗靑年會], 양주청년회(楊州靑年會), 의정부기독청년회(議政府基督靑年會), 금오청년회(金梧靑年會), 회천청년수양회(檜泉靑年修養會), 의정부소년회(議政府少年會), 창동소년회(倉洞少年會), 의정부소년척후대(議政府少年斥候隊), 동명소년회(東明少年會), 소작농회(小作農會), 양주진흥회(楊州振興會) 등이 있었다.

[항일 의병 운동]

양주는 의병적 전통이 강한 고장으로 경기 북부 지역의 의병이 활동할 때 의병 활동의 전방 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의병 전쟁이 본격화된 시기는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였다. 군대 해산을 반대하는 지방 진위대 구한국 군인들의 반일 봉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진위대 강화분견대에서 하사 유명규(劉明奎), 연기우(延基羽), 부교 지홍윤(池弘允) 등이 주도하여 봉기하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경기와 황해 지역으로 이동한 해산 군인들이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양주를 비롯한 경기 서북부 지방의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07년 9월에는 권준(權俊)이 적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봉기하였고, 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黙) 등도 양주와 파주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토벌로 조인환(曺仁煥) 의병 부대가 양주 지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면서 경기 지방의 의병 활동은 점차 강화되었다.

중부 지방의 의병 부대는 독립적인 의병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의병 부대 간 상호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연합 의병진을 구성하여 서울로 진입하여 일제를 몰아내자는 연합 의병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인영(李麟榮) 의병 부대와 허위(許蔿) 의병 부대 사이에 협의를 거쳐 13도 의병 통합군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鎭所)를 설치하여 서울로 진공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의병장과 의병 부대는 경기도 양주에 모이기 시작하여 48개 의병 부대원이 약 1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13도 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서울 진공 작전의 목적은 서울을 공격하여 일제 통감부를 파괴하고,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을 공고히 하고 간신을 살육하고, 의병 중에서 인물을 선임하여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의 선봉대는 허위의 지휘 하에 약 300명의 인원으로 서울 동대문 밖 약 12㎞[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어 오기로 한 이인영이 이끄는 후속 부대와 각도 창의대장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공에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결국 퇴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규식(金奎植)연기우 등이 부상을 당하였다. 더욱이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허위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귀향하자, 의병들은 흩어졌고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양주에서는 1908년 3월 박래병(朴來秉) 의병 부대, 8월 이후에는 황재호(黃在浩), 윤인순(尹仁淳), 김귀손(金貴孫)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연기우, 이은찬(李殷瓚), 김성교 등과 연합하여 일본 헌병 분견소와 수비대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특무정교 정용대(鄭用大)는 양주와 포천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밖에 양주에서 활동한 의병으로는 강기동(姜基東)·고재석(高在奭)·권득수(權得洙)·김규식·김노수(金老洙)·김봉기(金鳳基)·김연성(金演性)·김참위(參尉)·김춘수(金春洙)·노재훈(盧在勳)·박순근(朴順根)·박종한(朴宗漢)·방인관(方仁寬)·신명재·신창현·이근칠·이명호·이재익·이재학·이한경·장계원·전성서·전순만(全順萬)·정제환(鄭濟煥)·정충환(鄭忠煥)·추삼만(秋三萬)·최문봉·홍원유·홍종헌(洪鍾憲)·황순일(黃順一) 등이 있었다.

[3·1 만세 운동과 양주]

3·1 운동 당시 양주군의 전체 16개 면 가운데 회천면은현면을 제외한 14개 면의 주민들이 참여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즉 양주군 내 만세 시위는 미금면·와부면·화도면·진접면·이담면·노해면·백석면·구리면·장흥면·광적면·별내면·진건면·시둔면·주내면 등에서 횃불 시위와 연합 시위, 무력시위 등이 전개되었다. 백석면장흥면의 경우 야간의 횃불 시위를 시작으로 다음날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속 전개해 나갔으며, 리 단위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면 단위로 발전하였다.

면사무소와 헌병 분견소가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헌병과 격렬한 접전을 벌였고, 일본 헌병의 총격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양주군 내의 시위에서 117명의 피검자가 있었는데, 경기도 내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인원이었다. 이것은 양주군 시위 양상의 치열함과 주민의 투철한 민족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항일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양주 출신 인물 중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조소앙(趙素昻)과 그 형제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조용하(趙鏞夏)는 1905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1913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하와이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과 한인협회(韓人協會)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동생 조용주(趙鏞周)·조용한(趙鏞漢)·조용원(趙鏞元)·조용제(趙鏞濟)도 함께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소앙의 아들 조시제(趙時濟)조인제(趙仁濟)도 1930년대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현재 경기도 양주시 남면 양연로 173번길[황방리] 선영에는 조소앙·조용하·조용주·조용한의 묘소가 있다.

홍태순(洪太順)은 목회 활동을 하던 중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자 이에 항의하여 서울 대한문 앞에서 독약을 먹고 순절했으며, 목사 최성모(崔聖模)는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2년간 복역한 후 목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는 신간회에서 활동한 전진한(錢鎭漢),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조시원(趙時元),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7년 옥고를 치른 조한명(趙漢明) 등이 있다. 조순옥(趙順玉)은 1940년대 대한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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