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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91
한자 金炳淵
이칭/별칭 김삿갓,김립(金笠),난고(蘭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7년 3월 13일연표보기 - 김병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63 3월 29일연표보기 - 김병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8년 - 유적비와 동상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7년 - 시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3년 10월 - 난고 김삿갓 문학관 개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 『김립시집』 간행
출생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거주|이주지 황해도 곡산
거주|이주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활동지 서울
활동지 충청도
활동지 경상도
활동지 전라도 화순
묘소 김삿갓 묘 -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유적비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마을
동상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마을
시비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기념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안동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방랑 시인.

[개설]

김병연(金炳淵)은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할아버지는 선천 부사 김익순(金益淳)이고,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다. 어머니는 함평 이씨다. 형은 김병하(金炳河)이다. 아들은 김학균(金學均)과 김익균(金翼均)이다. 맏아들 김학균은 동생 집에 양자로 보냈다.

김병연의 출생지에 대한 학설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병연(金炳淵)의 묘소가 있는 강원도 영월에서도 김병연의 출생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으로 알고 있고, 백과사전을 비롯한 각종 자료에도 같은 학설이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양주시에서는 회암동 출생으로 알려진 김병연을 양주시의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키기 위한 연구 작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특히 2011년 10월 22일 ‘김삿갓 풍류문화 활용 지역문화발전 컨설팅 연구 공유 워크숍’이 양주시와 대진대학교 산학협력단 주최로 고읍도서관 문화강좌실에서 열렸다. 이 워크숍에서는 김삿갓 풍류의 전승을 위한 지속적인 연구와 김삿갓을 현대적 문화로 계승·발전하고, 김삿갓을 콘셉트로 한 공간 정비, 김삿갓 테마 지리적 연결과 지역 간 연계 등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2011년 5월 28일에 김삿갓 전국 문학 대회가 열렸는데, 그 의의는 김삿갓의 정신과 삶, 해학을 문학 대회를 통해 느껴보는 계기를 만드는 데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병연이 태어난 고향 양주시를 지속적으로 널리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양주시에서는 김삿갓의 출생지인 양주시를 적극 홍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이어나갈 예정이다.

[활동 사항]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천 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1811년(순조 11)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투항한 죄로 멸족을 당했기 때문이다. 노비 김성수가 김병연 형제를 구해 황해도 곡산(谷山)에 숨어 살다가 후에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면서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김병연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廢族者)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이사해 과거를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은 과거 시험에서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글을 써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 후 어머니에게서 자신의 과거사를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자책감이 시달렸다. 22세 무렵 처자식을 고향에 남겨 두고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고 다녔다. 김삿갓이라는 별칭은 이러한 차림새에서 나온 것이다.

김병연은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전국의 서당을 돌아본 뒤 4년 후 고향으로 돌아가 1년 남짓 머물렀다. 이때 둘째 아들 김익균이 태어났다. 다시 방랑길에 올라 서울, 충청도, 경상도를 돌고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년간 서당 훈장을 하였다. 어릴 때 살았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 집에서도 1년쯤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병연을 고향으로 모셔 가려고 아들 김익균이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그때마다 아들을 따돌리고 방랑을 계속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화순 동복에 쓰러져 있던 김병연구암리에 사는 정시룡이 구해 주었다. 정시룡의 집에서 반 년 가까이 머무른 뒤 다시 길을 떠나 지리산 인근을 돌아다녔다. 약 3년 뒤에 쇠약해진 몸으로 다시 구암리를 찾아간 김병연은 정시룡의 집 사랑채에 머물다가 1863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전통적인 한시에 비하여 파격적인 김병연의 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오랜 전통의 유교적 윤리와 가치기준이 흔들리던 전환기였다. 실력보다는 금력(金力)과 권력이 당락을 좌우하던 시기로 과거 제도는 극도로 문란한 상태였다. 양반 지식인들은 전국을 유랑하면서 해학이나 풍자를 방편으로 삶을 이어 갔으며, 당시의 상황에서 관료나 지주로서의 기반을 상실한 그들은 현실의 부적응자이기도 하였다.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이 싹튼 이유는 일종의 야유로 표출되었던 의식과 현실이 부합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반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한 김병연의 해학과 풍자는 숱한 일화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김병연은 문학적인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당시 몰락한 양반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1939년 이응수가 김병연의 시를 모아 『김립시집(金笠詩集)』을 간행하였다.

[묘소]

무덤은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8년 후손들이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마을에 7폭 병풍 모양의 시비와 동상을 세웠다. 1987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김병연이 살았던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시비를 세웠다. 2003년 10월에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현재 양주시에서는 난고김삿갓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김병연의 출생지인 회암동 일대를 김삿갓 공원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박** 과시험응시자는 삼대를 시험지에 기록해야 하는데
역적자손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양주군에 남아있는지요
또 양주군 과거시험 응시자 명단이 당연히 있고 장원자 명단도 있다
모 신문에서 김병연은 과거 시험을 보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양주군은 기록을 공개 해야 한다.
  •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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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귀하의 소중한 의견을 수렴하여 해당 사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진행해 수정 여부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결과 도출이 다소 늦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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