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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64
한자 李載允
이칭/별칭 성집(聖執),미석(渼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9년 4월 25일연표보기 - 이재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대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됨
몰년 시기/일시 1911년 7월 14일연표보기 - 이재윤 사망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성격 의병|문신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성집(聖執), 호는 미석(渼石). 고종의 종척(宗戚)이다.

[활동 사항]

이재윤(李載允)[1849~1911]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877년(고종 14)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매국 역적들을 참하자는 소를 올렸다. 이재윤은 스승인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뒤를 따라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1906년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패해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온 뒤 임병찬(林炳瓚)의 집에서 거사 계획을 꾸미며 이재윤에게 후원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재윤은 재산을 처분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장이 되니, 따르는 의병이 300여 명에 이르렀다. 양주군 설악산으로 집결할 때 일본군이 급습하자 한강 상류 연안 민호리에서 대치하다가 미금면 금곡리에서 교전하였고, 다시 광주군 서부면 송파장에서 교전하였으나 군량과 무기 부족으로 패하였다.

이재윤최익현의 지시를 받고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구원병을 요청해 항일 구국 운동을 중국에까지 확대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중국의 관헌들과 교유·협의하기도 했는데, 이는 1907년 고종의 퇴위로 인해 전개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재윤은 1911년 7월 13일 목을 매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가족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 듯하였으나 다음날 새벽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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