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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85
한자 許蔿
이칭/별칭 계형(季馨),왕산(旺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5년 4월 2일연표보기 - 허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참모장이 되어 김천 직지사에서 거병
활동 시기/일시 1899년 3월연표보기 - 영희전참봉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중추원의관,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04년 12월연표보기 - 정우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05년 11월 - 유인석·곽종석·이학균·정환직 등을 만나 거병 결의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연표보기 - 연천에서 거병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1월연표보기 - 전국 의병장들에게 격문을 보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월연표보기 -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양주로 후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연표보기 - 가평·적성의 의병에게 군사 훈련 실시 및 무기 제조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연표보기 - 전국 의병 부대에 통문을 보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5월연표보기 - 30여 개 요구 사항을 통감부에 제시
활동 시기/일시 1908년 6월 11일연표보기 - 영평군 유동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됨
몰년 시기/일시 1908년 10월 21일연표보기 - 허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66년 11월 26일 - 도로명 왕산로 제정
출생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묘소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순국기념비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
성격 관료|의병
성별
대표 경력 13도 연합 의병 부대 군사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관료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형(季馨), 호는 왕산(旺山). 아버지는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이고,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李氏)이다. 4형제 중 막내로, 형은 허훈(許薰)[1990년 애국장 추서]·허신(許藎)·허겸(許兼)[1991년 애국장 추서]이다. 자녀는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허학·허영·허준·허국이다. 허위(許蔿)의 장손녀 허로자[2006년 당시 80세]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거주하고 있고, 손녀 허아니시아[66세]가 있다. 허게오르기[당시 62세]와 허블라디슬라브[당시 56세]는 허위의 손자임이 밝혀져 2007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특별 귀화 증서를 받았다.

2008년 6월 9일 고국인 대한민국을 방문한 허위의 막내아들 허국[1972년 사망, 부인은 쉬라 알렉산드라로 1939년 사망]의 장녀 허가이 알렉산드라[78세, 하바로프스크 베젠스키 꾸바꾸바에 40세된 아들 알렉과 거주]가 있다. 또한 9촌 조카인 허벽[74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거주]이 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에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 이상 고향에서 살아가기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아들들을 데리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사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이로 인해 자손들이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고등경찰요사』에 “그 권속들은 모두 국외로 이주하고, 그 자손들은 불령(不逞) 운동에 종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허위[1855~1908]는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옛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허희(許禧)와 맏형 허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기찬(李起燦)·이은찬(李殷燦)·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1896년 3월 김산(金山)[지금의 김천]에서 수백 명의 의병으로 부대를 편성하여 이기찬을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는 참모장이 되었다.

이들은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치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으나 공주와 대구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이은찬과 조동호는 관군에게 붙잡혔다. 허위는 잔여 의병을 수습하여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북도 진천까지 진격했으나,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해산한 뒤 진보(眞寶)로 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9년 3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45세에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박사, 1904년에는 중추원의관, 평리원재판장, 의정부참찬, 비서원승 등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의정부참찬으로 있으면서 학교 건립,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 10조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과 함께 일본을 규탄하는 격문을 살포하였으며, 1904년 12월에는 일진회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하였다. 허위는 이 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풀려났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상도·전라도·강원도·경기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柳麟錫)·곽종석(郭鍾錫)·이학균(李學均)·정환직(鄭煥直) 등을 만나 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9월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양주를 비롯하여 적성·철원·파주·장단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병력을 증강하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어 전국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일본을 몰아내는 전쟁을 할 것을 계획하여 이인영과 상의한 뒤, 1907년 11월 전국 의병장들에게 연합 의병 부대를 편성하여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의병 연합 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인영은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이 되고 허위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1908년 1월 말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12㎞[30리]까지 진공했으나 지원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양주로 후퇴하였다. 이때 총대장인 이인영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문경으로 귀향하자 허위는 대리총대장 겸 군사장이 되어 총지휘를 맡게 되자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 등의 의병 부대와 함께 새로운 임진강 의병 연합 부대를 편성하였다. 의병들의 정신 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며,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 부대에 소요되는 모든 군수 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의병 연합 부대의 전법은 유격 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연합 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과 적성 방면의 의병 5,000명을 집결시켜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무기를 제조하였으며, 4월에는 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전국의 의병 부대에 통문을 보내고,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30여 개의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시하고, 그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할 것을 천명하였다. 허위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고종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이권 침탈 중지 등이었다.

항일 투쟁의 앞날을 준비하던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영평군 유동(柳洞)[영평은 지금의 포천시]의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9월 18일 사형을 선고 받고,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허위가 형장에 섰을 때, 일본인 승려가 그의 앞에서 명복을 빈다고 불경을 외자 “충의 넋은 천당에 가게 되어 있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원수놈의 손을 빌어 천당 가기를 바라겠느냐!”며 당당한 기개로 승려를 내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저술 및 작품]

1896년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의병 부대를 해산할 때, 우국지사로서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읊은 시 한 수가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한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영암산 중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중근(安重根)허위에 대하여 “만일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과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정부에서는 허위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제1호]을 추서하였다.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294번지 달성공원 내에 순국 기념비가 세워졌고, 금오산에 유허비가 있다. 1966년 11월 26일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도로를 왕산로(旺山路)라고 제정하여 허위를 기리고 있다. 또한 경상북도 구미시에서는 왕산허위선생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기념관 건립, 생가 성역화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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