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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544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최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토|발견 시기/일시 1990년대 - 겨리쟁기 발굴
전시처 농기구민속박물관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 99-2지도보기
성격 농기구
재질 쇠|나무
용도 논이나 밭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용된, 소 두 마리 이상의 힘을 이용해 논밭을 가는 쟁기.

[개설]

쟁기는 땅을 갈아엎어 잡초를 제거하고 토양을 다공성(多孔性)으로 만들기 때문에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기구였다. 겨리쟁기는 한국의 전통 쟁기 중 하나로, 중부 이북의 산간 지대에서는 주로 겨리쟁기를 사용하였다. 양주시 은현면 도하리에 있는 농기구민속박물관에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용된 겨리쟁기가 전시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겨리쟁기는 주로 토양이 거친 두메나 북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어 왔다. 황해도와 강원도의 북부를 경계로 하여 이남에서는 호리쟁기로, 이북에서는 겨리쟁기로 논밭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강원도의 경우, 1900년대 이후로는 영서 북부 지방에서만 겨리쟁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화전 경작을 시작하였던 초기에는 강원도의 거의 모든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형태]

겨리쟁기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호리쟁기와 특별한 차이는 없으나, 호리쟁기에 비해 보습 무게가 5.5㎏에 이를 정도로 무거워, 달구지나 경운기로 날라야 했다. 겨리쟁기는 무거울 뿐 아니라 소 두 마리의 힘을 한 군데로 모아야 하므로 다루기가 호리쟁기보다 어려웠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쟁기질은 젊은 남자가 혼인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될 정도였다. 쟁기질을 올바로 할 수 있는지가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다. 또한 쟁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모르는 머슴은 다른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새경을 다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두 마리 이상의 소에 쟁기를 메워 논이나 밭을 갈았던 겨리쟁기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산간 지역의 거친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였으며, 양주 지역의 산간 지대에서 화전 경작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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