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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006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양주시
집필자 서동일

[개설]

성씨의 연원은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나 찾아볼 수 있다. 왕건이 전국의 군·현 이름을 개정하고 개국 공신을 책봉했던 940년(태조 23)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고려 이전 고대 국가에서는 성씨가 왕실 및 일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양주의 토착 성씨는 조선 전기 사회 상황을 전하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는 현재의 양주를 견주(見州)로 표시하고 있는데, 견주에 있는 토착 성씨로 김(金)·백(白)·송(宋)·신(申)·윤(尹)·이(李)·피(皮)씨 등 7개의 성씨가 있다고 기록했다.

한편 조선 중·후기의 사정을 전하는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의 성씨조에서는 견주의 토착 성씨로 풍양 조씨, 한양 조씨 등 2개의 성씨를 소개했다. 지정학적으로 조선 시대 도성 인근에 있다는 점, 근대화 이후에도 수도 서울과 가깝다는 점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양주에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은 때로 양주에 뿌리내리기도 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양주 지역민들은 그들과 조화롭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양주를 만들어 온 토착 성씨를 조사해 보니…]

조선 시대에는 중앙 관직에 임명된 인물들이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 양주에 집과 농장을 마련하고, 양주의 토착 성씨와 혼인을 맺은 뒤 양주에 정착하여 동족 부락(同族部落) 즉 집성촌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때문에 외부로부터 다른 성씨의 유입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런데 집성촌이 형성되는 데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첫째,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입이나 국내의 정치적 변화를 피하기 위해 이주한 경우였다. 둘째, 국왕이 하사한 토지인 사패지(賜牌地) 주변에 정착한 경우였다. 셋째, 왕실 묘역 주변에 정착한 경우이다. 넷째, 중앙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낙향하여 정착한 경우였다. 조선 시대에 양주에 입향(入鄕)하여 집성촌을 이룬 대표적인 성씨로는 안동 권씨·김해 김씨·밀양 박씨·반남 박씨·고령 박씨·수원 백씨·은진 송씨·해평 윤씨·단양 우씨·전주 이씨·풍천 임씨·경주 정씨·수성 최씨·남양 홍씨 등이 있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일제가 식민 지배를 원활하게 진행할 목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기초 조사를 실시했고, 이때 전국의 성씨와 집성촌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1930년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양주에는 이씨(李氏) 등 114개의 성씨가 있었고, 그 중 김해 김씨·용인 이씨·전주 이씨·의령 남씨·수원 백씨·충주 최씨·남양 홍씨·고령 박씨 등이 집성촌을 형성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114개라는 숫자는 1953년의 조사 결과인 115개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양주에 살어리랏다]

양주를 대표하는 성씨로는 김(金)·이(李)·윤(尹)·송(宋)·조(趙)·진(陳)·최(崔)·한(韓)·낭(浪)·조(趙)씨 등이 있다. 성(姓)은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갖는 지역색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들 성씨는 양주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색깔은 동시에 양주를 본관으로 하는 선조 때부터 이미 이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그 시작은 고려 시대로부터 나오고 있다.

먼저 양주 김씨의 시조 김원보(金元寶)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다. 고려 고종 때 예부상서, 추밀부사로 양주백(楊州伯)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은 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양주 윤씨도 그 시조는 고려 시대 사람인 윤숭(尹崇)이다. 그 아들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역임한 윤덕방(尹德方)이 자리 잡으면서 양주 윤씨는 윤덕방을 시조로 하고 있기도 하다.

양주 진씨(楊州陳氏)의 시조 진인광(陳仁光)은 고려 시대에 장야서령(掌冶署令)을 역임하면서 그 후 어느 순간 양주를 본관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양주 최씨(楊洲崔氏)의 시조는 최억(崔億)이다. 그는 고려 때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명성이 높아 태사(太師)에 천거(薦擧)되었으며,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있다. 1353년(공민왕 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은 최억을 시조로 하면서 본관을 양주로 삼았다.

양주 한씨(楊州韓氏)의 시조는 한란경(韓蘭卿)이다.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양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결국 후손들은 청주 한씨에서 분관하여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양주 이씨의 시조는 이석숭(李碩崇)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양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 집안의 후손으로 조선 시대에 진사(進士)를 지냈다고 한다.

[살다 정들면 고향이라]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이 어려서부터 자란 곳을 떠나 새로운 마을로 이주하여 정착하는 경우가 있다. 생계형·도피형·목적형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면 떠나야지 하면서 10년, 20년, 30년 지나고 자녀들이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고 하는 순환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나는 양주 사람이야’라고 하는 생각이 강해진다. 그래서 ‘살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양주에 자리 잡은 성씨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그것도 머나먼 이국의 땅에 와서 정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후손을 배출한 집안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양주 조씨(楊州趙氏)의 시조는 조잠(趙岑)이다. 그는 송나라 태조의 후예로 고려 시대에 양주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는데, 그의 선계 4형제는 기묘하게도 한국 성씨의 뿌리를 만들었다. 첫째는 백천 조씨(白川趙氏), 둘째는 풍양 조씨(豊壤趙氏), 셋째는 한양 조씨(漢陽趙氏), 넷째는 양주 조씨를 이룬 것이다. 이외 우리 성씨 중 낭씨(浪氏)를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양주 조씨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 인조 때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양주 낭씨(楊州浪氏)의 시조는 낭초(浪礎)로 전해진다. 명(明)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는데, 간신의 참소로 명나라에 머무를 수가 없자, 조선 인조 때 배를 타고 조선으로 망명해 온 것이다. 그리고 양주에 자리 잡으면서 양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계를 만들었고, 양주 낭씨의 시조가 되었다.

[어찌 떠난단 말이요, 고향을!]

현재 남아 있는 집성촌 가운데 토성(土姓)은 매우 드물다. 대개 외부에서 들어온 이성(異姓)이 많다. 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6·25 전쟁 기간에는 의외로 집성촌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시대 경기북부지역 집성촌과 사족』[정만조 외, 2004]을 펴낸 국민대학교 조사팀은 1997~1999년 경기 북부 지역의 집성촌을 조사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양주 지역이 38선에 인접해 있어 6·25 전쟁 기간에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와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즉 6·25 전쟁으로 인해 집성촌의 구성원들이 다수 사망하고 대대로 전해지는 자료들이 분실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전쟁이 수백 년 간 지속된 집성촌을 해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혈연적 집단성은 강했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전쟁이 아닌 다른 곳에 원인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조사 결과였다. 실제로 2011년 7월 양주 일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집성촌의 축소, 해체된 근본 요인은 전쟁이 아니었다.

1960년대 이후 사회 변화를 주목하였는데, 그것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였다. 결국 이로 인해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빠져나갔다. 결국 이 점이 큰 요인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에는 같은 성씨들이 혈연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집성촌을 형성해 함께 모여 살았던 데 비해, 1960년대 이후에는 집성촌은 점차 사라지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직장 혹은 거주의 편의에 따라 분산되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생계를 위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눈물을 머금고 가슴을 저며도 발길을 옮기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교통의 발달과 산업화 등은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하루아침에 바꿔버렸던 것이다.

[10살 아저씨, 60살 조카가 함께 매화를 즐기는 곳, 맹골마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떠나버린 버스를 탔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손수건을 흔들고 눈물을 훔치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야 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더 끈끈해졌다. 사람들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더 장점으로 만들었다. 수원 백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진 경기 북부 지역 양주시 남면 매곡리 매곡마을은 우리 고유의 유교 문화를 고수하는 곳이 되었다. 매곡마을 혹은 맹골마을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데, 마을의 모습을 보면 큰 매화나무를 중심으로 80여 가구의 수원 백씨가 살고 있다.

맹골마을 앞으로 감악산 정상에 오르면 개성이 바로 눈앞에 펼쳐질 정도로 북녘과 가깝다. 수원 백씨맹골마을에 자리 잡은 것은 340년 전이었다. 맹골마을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 있는데, 상대방을 대할 때 서로 항렬(行列)을 지켜 존댓말을 하고 존중하면서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간다. 한편 처마 끝이 멋스러운 오래된 한옥 고택에서부터 현대식으로 개조한 맹골마을의 한옥들에선 여전히 사람들의 숨결이 묻어나고 있다. 마을을 떠나 도시로 출가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찾고, 마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맹골마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삶의 종류와 질이 달라진 것이다.

맹골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시설 채소 재배와 화훼 재배, 낙농 축산업을 생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접경 지역 체험 마을’로 지정된 뒤 마을 내에 양주 백수현 가옥, 목공예 체험장, 치즈 체험장, 한지 공예 체험장, 전통 발효 음식 체험장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생 식물 연못과 잣나무 숲이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어 자연과 함께 하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전통과 다양한 즐길거리를 체험하러 오는 외지인들은 그러한 맹골마을에 환호성과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즐거운 체험거리, 거기에 더하여 외지인을 대하는 맹골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나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나오는 마을, 여산 송씨 집성촌 득성마을]

여산 송씨의 집성촌은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있다. 이 마을은 400여 년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득세이·득성마을로 불린다. 그런데 왜 은현면이요, 득성마을이요 하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은현(隱賢)이라는 이름은 ‘어진 이가 은거하여 사는 곳’이란 의미가 된다. 어쨌든 현인이 사는 곳이므로 그 후손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득성(得聖)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송씨 가문에서 문장을 잘하는 대단한 인물이 배출된 때문이다. 이들을 일러 성인을 얻었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여산 송씨가는 명문 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것은 송인(宋寅)·송질(宋軼) 등 조선 시대 명문장가가 연이어 나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성인이 계속 나오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의 정착 배경과 모두가 바라는 소원 성취의 의미에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성인이 배출될 지도 모른다.

[아픔을 씻기 위하여 찾은 신선이 노니는 마을, 창녕 성씨 집성촌 선유동]

조선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연산군 때 좌의정이며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연산군 5) 13세로 진성대군(晉城大君)이던 중종과 가례를 올린다. 그리고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신수근의 딸은 왕비로 책봉된다. 하지만 반정 주체 세력은 신수근을 해하고 중종에게 왕비를 폐하도록 강권하였다. 그 후 단경왕후는 1557년(명종 12) 사저에서 71세로 승하하여 신씨 묘역에 묻히게 된다.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창녕 성씨 가문이 양주의 온릉[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부근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온릉이 형성되면서 창녕 성씨들은 조상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근처로 묘를 옮기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신선이 노니는 동네인 선유동(仙遊洞)으로 들어가면서 창녕 성씨 사람들은 유유자적하면서도 교육과 생계 등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집성촌이 유용한 것이라 여겨진다. 서당을 열어 마을의 아이들에게 한학을 자체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 후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선유동에 집성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양주시와 인접해 있는 선유동은 양주시 중심에서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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