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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387
한자 高麗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한정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4년연표보기 - 양주목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7년 8월연표보기 -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파견
특기 사항 시기/일시 995년 12월 - 좌신책군 중 하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12년연표보기 - 5도호(都護) 75도안무사(道按撫使) 중 하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18년연표보기 - 양광도 편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067년연표보기 - 남경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171년연표보기 - 양광충청도에서 양광주도 분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08년연표보기 - 한양부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82년연표보기 - 남경 임시 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0년 9월연표보기 - 남경 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91년 2월연표보기 - 개경 환도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양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기도 양주시와 관련하여 양주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은 898년 부터이다. 양주와 함께 이미 견주(見州)도 이때 설치되어 있었다. 이후 고려 시대의 양주를 편의상 건국 후 정종(靖宗) 대까지를 초기, 문종(文宗) 대부터 원종(元宗) 대까지를 중기, 충렬왕(忠烈王) 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초기 양주의 변천]

898년 궁예왕건(王建)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켰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항복해 들어 온 견훤에게 식읍(食邑)으로 양주를 내려 양주 지역에 대한 본격적 경영을 시작하였다. 양주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984년(성종 3) 12목을 설치할 때 양주가 포함되어 최고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가 되었으며, 중앙으로부터 수령이 파견되었다. 이후 987년(성종 6) 8월에는 양주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가 각각 한 명씩 파견되었고, 993년(성종 12)에는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민생을 돕게 하였다.

995년(성종 14) 12절도사제로 개편되면서 양주의 군호(軍號)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어 우신책군인 해주와 함께 수도 개경을 보위하는 좌우2보(左右二輔)가 되었다. 1012년(현종 3)에 12절도사가 혁파되면서 5도호(都護) 75도안무사(道按撫使)가 설치되자 양주에도 안무사가 설치되었고, 5도 양계로 재편될 때는 광주(廣州)와 함께 양광도의 중요 도시가 되었다. 한편, 견주는 1018년(현종 9)에 양주목에 속하기도 하였다. 1067년(문종 21) 에 이르러 양주는 마침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면서 서경·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되었다.

[고려 중기 남경으로서의 양주]

양주 지역은 기본적으로 충청도와 강원도를 개경과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비옥한 평야에서 많은 곡물이 산출되어 경제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군사 방어 시설과 관련한 봉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위치상 예성강을 중심으로 무역항의 배후 도시로서 송과의 무역로 및 일본과의 교역에 있어서도 양주는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풍수도참상으로 왕업을 연장하기 위한 명당으로 양주 지역이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중기 양주 지역은 남경으로 승격되었고, 1068년(문종 22)에는 신궁(新宮)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숙종[재위 1095~1105] 때 김위제(金謂磾)는 상서(上書)를 통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개국 후 160년이 지나 목멱양(木覓壤)[지금의 서울]에 도읍한다.”는 구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남경 천도 움직임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 예종, 인종, 의종 등은 자주 남경에 행차하여 남경의 백성을 위로하면서 풍수도참상의 중요도를 반영하려 하였다. 이때 남경은 직할지로서 교하군과 견주·포주·행주 등 3속군과 6속현을 거느렸다. 이처럼 고려 중기 양주는 남경으로서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 후기 양주의 변천과 천도]

고려 왕조는 고종 대에 이르면서 왕조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몽골군의 침략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양주는 수도 개경을 보위하는 군사적 위치를 가졌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다. 결과적으로 양주는 지방 행정상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먼저 무신 정권기에 해당하는 1171년(명종 1)에는 양광충청도가 양광주도와 충청주도로 나뉘게 되자 양주 지역은 양광주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치소는 양주에 두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은 행정 제도 개편 때 남경한양부로 격하 개편하였는데, 이는 결국 고려 삼경제(三京制)[개경·서경·남경]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양주 지역 세력 역시 축소되었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 남경 천도가 다시 추진되면서 대대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반대 등으로 천도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1381년(우왕 7)에 이르러 서운관(書雲觀)에서 남경 천도를 다시 주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이려 했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인임(李仁任)[?~1388]의 반대로 역시 무산되었다. 1382년(우왕 8) 남경으로의 임시 이주를 단행했으나 6개월 뒤 개경으로 환궁하였다.

이후에도 우왕은 항구적 천도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던 듯하다. 그만큼 남경은 새로운 도읍지로서 부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더욱 추진한 것은 공양왕 대였다. 1390년(공양왕 2) 9월 공양왕은 정식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에 따라 한양부를 포함한 지역은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경기를 확장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설치하였다. 좌도에는 장단·임강·귀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 등의 8현, 우도에는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 등 5현이 속하게 되었다. 특히 좌도에는 교하·양주 등이 내속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의 남경 천도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천재지변 등을 빌미로 천명(天命)을 따르고 왕도(王道)를 행할 것을 간하는 상소가 잇따르면서 남경 천도가 그 해법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개경으로의 환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되어 온 남경 천도 계획과 일시적이지만 실제 천도의 단행 등이 이루어진 면을 본다면 양주는 도읍지로서의 자연환경과 군사 방어적 의미, 풍수도참적 의의와 교통 편의 등이 모두 갖추어진 곳으로서 주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적과 인물]

고려 시대 양주는 당시 수도이던 개경이나 남경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이러한 지리적 근접성과 함께 양주시의 자연 및 생활 환경 등도 당시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했다. 이러한 역사상을 보여 주는 것이 생활 유적 등인데,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은현면 운암리·도하리의 유물 산포지, 덕정동·옥정동·삼숭동·남방동·광사동의 유물 산포지, 백석읍 오산리의 유물 산포지 등이 이를 반증해 준다. 또한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부곡리에서는 가마터가 조사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입암리 고분이나 방성리 석곽묘 등도 무덤 유적으로 조사되었다.

12세기 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회암사(檜巖寺)는 고려 후기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주석하면서 널리 주목되었고 그의 제자 나옹(懶翁)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깊은 인연이 있던 무학(無學)이 주석하기도 하였다. 목은 이색(李穡)회암사에 대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머무르는 대사찰임과 동시에 동국 제일의 아름답고 화려한 사찰이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냐* 양주시가 남경이 되면 이해안되는 부분이 생기네요.
조선왕조 태조실록에 보면 도읍을 정할때, 남경으로 가서 거기서 이곳을 새도읍으로 정하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남경=한양 이라는 말인데,

남경이 양주면 설명이 안됩니다. 양주에서는 북한산이 사이에 있어 한양과는 동떨어져있지요. 태조실록이 틀렸거나 남경이 양주가 아닌 한양이었거나 둘중 하나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려시대의 양주는 양주목(지방12목 중 하나)으로 경기도 북부 지역을 아우를 정도의 큰 땅이었고, 지금의 서울까지 포함하였습니다. 고려 문종 때 서울이 4경의 하나인 남경이 되자 양주도 더불어 중앙행정구역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서울이 도읍이 되자 서울을 둘러싼 울타리로서 그 위치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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