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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도 중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18
한자 楊州道 中翼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학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55년연표보기 - 양주도 중익 편성
개정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양주도 중익이 양주진으로 변경

[정의]

조선 전기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경기도 양주에 설치된 군사 조직.

[제정 경위 및 목적]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를 위한 진관 체제가 성립되기 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던 영(營)·진(鎭)을 내륙에 있는 주현(州縣)에도 설치하여 방어의 허술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1455년(세조 1)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다시 중·좌·우의 3익(翼)으로 나누었다. 이것이 진관(鎭管) 체제의 선구적 모습이었다. 이에 따라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양주도 중익이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양주도 중익에 대한 내용은 『세조실록(世祖實錄)』 세조 1년 9월 11일 기사와 세조 3년 10월 20일 기사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 1년 기사를 보면, 병조(兵曹)에서 “각도(各道) 연해(沿海)의 요해지(要害地)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그 방어를 견고히 하고 있으나, 내륙의 주현(州縣)에는 아직 진을 설치하지 않아서 만약 구적(寇賊)이 발생하여 변진(邊鎭)이 감히 이를 막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마구 들어와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밟는 것처럼 할 것이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내지(內地)에도 적당히 요량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근방(近方)의 여러 고을을 중익(中翼)·좌익(左翼)·우익(右翼)에 분속시키도록 하소서.”라 하고, 익(翼)을 나눌 여러 고을과 절목(節目)을 기록해 아뢰었다. 경기의 양주도(楊州道)는 그 중익을 양주(楊州)·원평(原平)·포천(抱川)·적성(積城)·가평(加平)으로 하고, 좌익은 삭녕(朔寧)·마전(麻田)·영평(永平)·연천(漣川)으로 하고, 우익은 풍덕(豊德)·장단(長湍)·임진(臨津)·임강(臨江)으로 하였다. 또한 해당 수령 및 관리들의 직함과 역할 등에 대해서도 문서로 아뢰어 임금이 허락하였다.

세조 3년 기사에는 병조에서 “이제 전지(傳旨)를 받들어 제도(諸道)의 중익(中翼)·좌익(左翼)·우익(右翼)을 혁파하고, 양탁(量度)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소속된 바의 모든 고을을 마감하여 계문(啓聞)합니다.”라 하고 경기의 양주진(楊州鎭)에는 연천(漣川)·마전(麻田)·적성(積城)·원평(原平)·교하(交河)·고양(高陽)·수평(水平)·포천(抱川)·가평(加平)을 속하게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내용]

양주는 1455년(세조 1) 원평, 포천, 적성, 가평 등과 함께 양주도의 중익에 편성되었다. 좌익은 삭녕, 마전, 영평, 연천이 편제되었고, 우익은 풍덕, 장단, 임진, 임강 등이 편성되었다. 군익도 편성 시 경기도에는 양주도 외에 광주도(廣州道)와 부평도(富平道)가 있었다.

[변천]

군익도 체제가 1457년(세조 3) 진관 체제로 바뀌면서 양주도 중익은 양주진으로 변경되었다. 경기도에는 양주진 외에 수원진, 광주진, 강화진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양주를 중심으로 군사 체제가 편성된 것으로 보아 당시 양주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양주목은 경기도의 가장 큰 진(鎭)으로 경기도 북부와 동부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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