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431
한자 烽燧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학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봉수 아차산 봉수 -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봉수 대이산 봉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정의]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운영된 군사용 통신 수단.

[개설]

봉수는 조선 시대 통신 수단으로 설치 운영된 것으로 긴급한 군사상의 연락 사항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중앙에 전달하는 데 이용되었다. 전국 620여 개의 높은 봉우리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서울의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으로 연결되었다.

[조선 시대 봉수 노선]

『세종실록(世宗實錄)』 1423년 2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조선 시대의 봉수는 동서 총 5개 노선이 있었다. 제1선은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영평과 포천을 지나 양주의 아차산을 거쳐 목멱산으로 연결되었고, 제2선은 경상도 동래에서 시작하여 죽산과 용인을 지나 광주(廣州)의 천림산을 거쳐 목멱산으로 이어졌으며, 제3선은 평안도 강계를 출발하여 장단과 파주 및 고양을 지나 한성부의 악동봉을 거쳐 목멱산으로 연결하였다. 제4선은 평안도 의주로부터 풍덕과 교하를 지나 한성부의 모악서봉을 거쳐 목멱산으로 이어지고, 제5선은 전라도 순천에서 시작하여 수원과 남양, 안산을 지나 양천의 개화산으로부터 목멱산으로 연결되었다.

[양주의 봉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보면 양주에는 대이산(大伊山)과 가구산(加仇山)[지금의 아차산]에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이산 봉수는 양주부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포천의 잉읍점(仍邑岾) 봉수에 연결되고 남으로는 가구산 봉수에 이어졌으며, 가구산 봉수는 양주부의 남쪽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대이산 봉수에 이어지고 남으로는 서울의 목멱산에 연결되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한이산(汗伊山)[대이산]과 아차산 봉수의 위치 및 관원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한이산 봉수는 건천면[지금의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데, 양주 중심에서 동쪽으로 20㎞[50리] 되는 지점이다. 포천의 광산봉과 8㎞[20리] 거리를 두고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아차산 봉수와 12㎞[30리] 거리를 두고 이어져 있으며, 관원으로는 감관 1명과 군인 25명, 그리고 보인(保人) 50명이 있었다. 한편 아차산 봉수는 망우리면에 있는데, 양주 중심에서 남쪽으로 20㎞ 지점이다. 북쪽으로 한이산 봉수와 연결되고 남쪽으로 목멱산과 6㎞[15리] 거리를 두고 있으며, 관원은 한이산 봉수와 동일하게 두었다.

[양주의 간이 봉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양주의 봉수는 대이산 봉수와 아차산 봉수 둘 뿐이지만, 양주에는 이들 봉수외에도 여러 곳에 봉수 터가 남아 있다. 우선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우고리에는 파주와 경계가 되는 큰 산인 노고산에 봉수 터가 남아 있다. 서쪽으로는 아차산을 접하고 남쪽으로는 해유령에 잇닿은 감악산 낙맥으로 산세가 굽이굽이 뻗어내려 일대장성을 이루고 있는 노고산 정상에는 노고할미가 쌓았다고 하는 성이 남아 있다. 규모가 매우 협소한 것으로 보아 봉화대일 가능성이 있다. 규모는 둘레 25m 정도이며 높이는 3m이고 잡석으로 쌓았다. 내부 넓이는 66㎡[20평] 정도이다.

한편,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에도 봉수 터가 남아 있는데,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며, 규모는 넓이가 약 660㎡[200평] 정도이고 높이는 약 3m이다. 그리고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도 봉수 터가 남아 있다. 넓이는 174.9㎡[53평]로 매우 작은 규모이다. 이외에도 양주시 백석읍 은봉산에 봉수 터로 불리는 곳이 남아 있다.

양주시 덕정동에도 봉우재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 ‘봉화를 피우는 고갯마루에 있는 산’이라는 뜻에서 봉화재산[烽火재山]인데, 이것이 봉우재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현지에 구전으로 전해지는데, 산 정상에 터만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어 흔적조차 살펴볼 수 없다. 봉우재는 주봉(主烽) 즉 이들 봉수대를 직접 연결하는 봉수로였거나, 간봉(間烽) 즉 주봉에 보다 세밀한 지역 정보를 전달하는 보조 봉수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양주시 산북동에도 봉화대라고 하는 지명이 남아 있어 양주에는 여러 곳에 간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