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615
한자 楊州溫陵
이칭/별칭 온릉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일영리 산1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739년 - 신씨가 왕후로 복위
조성 시기/일시 1807년연표보기 - 사적비 조성 연도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87년 - 단경왕후 신씨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57년 - 단경왕후 신씨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 26일연표보기 - 양주 온릉 사적 제210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양주 온릉 사적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99년 8월 19일 - 정조가 작헌례를 행함
현 소재지 양주 온릉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일영리 산19][좌표: N37° 43′ 10.7428″, E126° 57′ 04.9269″]지도보기
성격 능묘
양식 단분
관련 인물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신수근(愼守勤)
봉분 크기/묘역 면적 217,090.91㎡
소유자 국유
관리자 서오릉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에 있는 조선 후기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의 능묘.

[개설]

양주 온릉(楊州溫陵)은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자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1487~1557]의 능이다. 단경왕후 신씨의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아버지는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이다. 1499년(연산군 5) 중종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있을 때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에 책봉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왕후에 오른 지 7일 만에 폐출되었다.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에 반대하여 성희안(成希顔)[1461~1513]과 박원종(朴元宗)[1467~1510] 등의 반정 추진파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역적의 딸이라 하여 폐위된 것이었다. 1739년(영조 15)에 다시 왕후로 복위되었다.

[위치]

의정부시에서 고양시로 가는 국도 39호선을 따라 가다 보면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능고개가 나오는데, 능고개를 넘으면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 양주 온릉을 찾을 수 있다.

[변천]

『영조실록(英祖實錄)』 1739년(영조 15) 3월 28일 기록에 의하면, 신비(愼妃)의 시호를 단경(端敬)이라 하고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이라 하였으니, ‘단(端)’이란 예를 지키고 의를 지키는 것이며, ‘경(敬)’이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신씨(愼氏)는 죽은 뒤 양주 서산(西山)의 수회동(水回洞) 북쪽 언덕에 묻혔으며, 1739년 복위되었다.

단경왕후 신씨가 복위된 후 온릉에 대한 정비와 제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영조는 1739년 8월 19일 일출 때에 온릉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 즉 묘소에 술 따르는 예식을 행하였다. 1799년(정조 23)은 능호를 지정한 지 6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정조는 특별히 작헌례를 행하였고, 임금의 장인이었던 신수근에 대해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온릉의 사적비는 묘소 정비 과정에서 가장 늦게 조성되었다. 정조 대에 계속되는 조정 신하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사적비는 1807년(순조 7)에 이르러서야 조성되었는데, 이는 연산군 축출에 반대한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의 행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온릉철종 대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하였다. 철종 행장에는 온릉의 나무를 베어 낸 일이 적발되어 관련 관원을 파직시켰다는 기사가 있으며, 고종 대에는 온릉 재실(齋室)의 당직자가 쓰는 물건을 도둑맞거나 묘소 주변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형태]

묘는 단분이고, 호석 2기와 양석 2기 및 상석(床石)·망주석(望柱石)·문인석(文人石)·마석·장명등 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좌향은 동남향이다. 문인석은 복두 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였고, 규모는 총 높이 205㎝이다. 망주석은 기대석을 갖추었고, 몸돌에는 좌상 우하의 세호를 양각하였다. 규모는 총 높이 234㎝이다. 장명등은 사모 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추었고, 화사석 네 면에는 외방 내원형의 화창을 내었다. 규모는 옥개 너비 88×92㎝, 총 높이 234㎝이다. 상석은 북돌[지름 58㎝]이 받치고 있는데, 북돌의 네 면에 귀면을 조각하였다. 양석은 총 높이 69㎝, 호석은 총 높이 78㎝, 마석은 90㎝이다.

봉분이 있는 묘역 아래에 정자각과 비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비각에는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이라 새긴 옥개형의 2면 비가 있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는 비석 뒷면에 새겨진 금석문을 통해 숭정 기원후 180년인 1807년임을 알 수 있다.

[현황]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1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국가 소유로 서오릉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현재 일영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양주 온릉은 군사시설보호구역 내에 위치해 있어 일반인의 접근과 출입이 어려웠지만, 2019년 11월 14일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시범 개방 되었다. 한편 양주 온릉에서 멀지 않은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의 절골에는 단경왕후 신씨가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나와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쌍계사 절터가 남아 있다. 특이한 것은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의 묘와, 같은 시기에 서로 반목하게 되는 성희안의 묘가 같은 절골 안에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의의와 평가]

양주 온릉은 조선 후기 왕릉의 조성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유적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1.21 2019년 내용 현행화 [현황] 비공개 왕릉이며,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 2019년 11월 14일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시범 개방 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