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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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子雲 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도남 |
조성 시기/일시 | 14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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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416년 - 윤자운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478년 - 윤자운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4월 15일![]() |
현 소재지 | 윤자운 묘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좌표: N37° 47′ 38.1184″, E126° 57′ 18.4196″]![]() |
성격 | 유적 |
양식 | 단분 |
관련 인물 | 윤자운(尹子雲) |
문화재 지정 번호 | 양주시 향토 유적 제9호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학자 윤자운(尹子雲)의 묘와 신도비.
윤자운[1416~1478]은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자는 망지(望之), 호는 낙한재(樂閑齋),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수찬·이조좌랑·사간원 좌헌납·승정원 도승지·영의정을 지냈다. 사람됨이 단아하고 세밀하여 일생 동안 관부의 탄핵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고, 예종이 죽은 뒤에는 한명회(韓明澮)[1415~1487]·신숙주(申叔舟)[1417~1475]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사신(史臣)은 윤자운이 성품이 편협하고 아무런 재능이 없으면서도 의정부의 고관이 되어 별다른 정책을 건의한 것도 없고, 이시애(李施愛)[?~1467]의 난 때에는 협박을 받고 적이 조정을 속이려는 문서에 서명하고 적을 대할 때마다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다고 혹평하였다.
양주시 광적면 가납사거리에서 장흥면으로 넘어가는 국도 39호선을 따라 백석읍 홍죽리에 이르면 길가에 윤자운 묘(尹子雲墓)와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묘는 단분(單墳)이고, 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문인석(文人石)·장명등(長明燈) 등의 옛 석물을 갖추었다. 좌향은 동남향이다. 문인석은 복두 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였고, 총 높이는 189㎝이다. 장명등의 규모는 옥개석 한 변의 길이가 35㎝이고, 총 높이는 113㎝이다. 한편 신도비는 운수형 1면 비로,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규모는 운수가 너비 103㎝, 두께 28㎝, 높이 75㎝이고, 비신이 너비 91㎝, 두께 20㎝, 높이 200㎝이며, 비좌가 너비 166㎝, 두께 36㎝, 높이 97㎝이다.
신도비의 전액은 ‘증 시 문헌공 신도비(贈諡文憲公神道碑)’이고, 비제는 ‘유명 조선국 추충 위익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예문관·홍문관·관상감사 무송부원군 증 시 문헌 윤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推忠衛翼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藝文館弘文館觀象監事茂松府院君贈諡文憲尹公神道碑銘幷序)’이다. 비문은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짓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정난종(鄭蘭宗)[1433~1489]이 썼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1479년(성종 10)이다.
1986년 4월 15일 양주시 향토 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윤자운 묘 바로 아래에는 정경부인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묘가 있고, 그 아래로 첨지중추부사 윤한(尹瀚)과 숙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소 아래에는 신도비가 비각에 보존되어 있는데, 구 신도비 옆에 새로 만든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한편 윤자운의 아버지 윤경연의 묘는 윤자운 묘에서 북서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