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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713
한자 紺岳山祠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감악산사 터 지표 조사 실시
소재지 감악산사 터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지도보기
성격 사당 터

[정의]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감악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사당 터.

[변천]

감악산사(紺岳山祠)감악사(紺嶽祠)라고도 불리며, 삼국 시대부터 사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에는 “감악산 정상에 사당이 있는데 감악산 산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중기에 거란이 침입해 왔을 때 신령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여 국가적인 제사와 민간 신앙의 숭배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감악산의 사당은 감악사(紺岳祠)인데 이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서 처음 등장한다. 1409년(태종 9) 기사에는 감악산 신당(神堂)이 보이는데 이것은 감악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위판(位版)은 없고 단지 진흙으로 만든 이상(泥像)이 총 6개 있었으나, 나중에 ‘감악산지신(紺嶽山之神)’이라는 위판을 정식으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1500년(연산군 6) 2월 12일 기사에는 신당의 제청(祭廳)을 고치는데 140일이 걸렸다고 하니, 이는 사안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도 감악사에 대한 제사는 계속되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3척(尺)[90.91㎝] 높이의 석단(石壇)이 있고, 오래된 비석과 설인귀 사당[설인귀사(薛仁貴祠)]이 있다”고 하였고, 『적성현지(積城縣誌)』[1871]에서는 “1년에 3차례 제사를 올리는데 향(香)·축(祝)·폐(幣)는 영문(營門)에서 받아온다”고 하였다. 『적성현지』[1842]에 따르면, 고려의 문신 김돈중(金敦中)정중부의 난 때 좌승선(左承宣)이었는데, 변란 소식을 듣고 취한 척하고 말에서 떨어져 이곳으로 피하였으며, 후일 정중부의 명으로 사천(沙川) 가에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위치]

감악산사 터양주시 남면 신암리 감악산 정상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발굴은 진행되지 못하였지만,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사당 터 주변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당시 기와 파편과 자기 파편이 조사되었으며, 감악산사 터 아래에서는 숯불 가마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현황]

현재 감악산사 터는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는 넓은 공터로 변해 있으며, 주위에 감악산 비(紺岳山碑)[빗돌대왕비]가 있다. 감악산사에 모셨던 산신은 일반 주민들의 증언이나 문헌을 참고하면, 대개 신라의 통일 전쟁을 돕기 위해 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614~683]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감악산사 터감악산에 얽힌 전설인 설인귀 관련 설화는 물론, 삼국 시대 및 고려, 조선 시대 역사의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당이 감악산 정상에 있었음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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