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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769
한자 權慄
이칭/별칭 언신(彦愼),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충장(忠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7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2년연표보기 - 식년문과 병과 급제, 승문원 정자, 전적, 전라도 도사
활동 시기/일시 1583년연표보기 - 예조 정랑, 예조 좌랑, 호조 좌랑, 경성 판관
활동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의주 목사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광주 목사, 금산군 이치에서 왜군 격퇴, 전라도 순찰사, 수원 독성산성에서 왜군 격퇴
활동 시기/일시 1593년 2월 12일연표보기 - 행주대첩
활동 시기/일시 1593년 6월연표보기 - 도원수, 호조 판서, 충청도 관찰사, 도원수
활동 시기/일시 1596년연표보기 -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파직, 한성부 판윤으로 재기용, 비변사 당상 겸직
활동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울산에서 대진
활동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사임
몰년 시기/일시 1599년 7월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영의정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행주대첩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선무공신 1등 영가부원군 추봉
추모 시기/일시 1841년연표보기 - 기공사 건립
추모 시기/일시 1861년연표보기 - 신도비 재건립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대첩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70년연표보기 - 충장사 재건립
출생지 강화군 영동
묘소|단소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석현리 산168-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기공사[행주서원]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석현리 산168-1]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장사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산162-1
신도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행주내동 산26-2]
기념비 행주 대첩비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행주내동 산26-2]
기념비 대첩비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행주내동 산26-2]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도원수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 권부(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 부사 권적(權勣),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창녕 조씨로 첨정 조휘원(曺輝遠)의 딸이고, 둘째 부인은 죽산 박씨로 현령 박세형(朴世炯)의 딸이다. 슬하에 딸 한 명을 두었는데, 오성공(鰲城公)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이 없어 둘째 형의 아들인 권익경(權益慶)을 후사로 삼았다.

[활동 사항]

권율(權慄)[1537~1599]은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전적을 거쳐 전라도 도사, 다음해에 예조정랑·예조좌랑·호조 좌랑·경성판관을 지냈고, 1591년 의주 목사로 부임했으나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에 임명되었다. 한양이 함락된 후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자 곽영의 아래에 들어가 중위장이 되었다.

한양 수복을 위해 북진하던 중 용인에서 소규모 왜군 부대를 만났다. 권율은 큰 싸움에 대비해 자중책을 주장하였으나 이광이 듣지 않고 공격을 명하여 선봉장 이시지(李時之)와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권율은 간신히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뒷일을 계획하였다.

남원에 주둔할 때는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동복 현감 황진(黃進)과 함께 금산군 이치(梨歭)에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격파하고, 호남을 지킨 공으로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하였다. 정예병 8,000명을 이끌고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한양으로 진격하던 중 수원 독성산성에서 유인책을 펴 우키타[宇喜多秀家] 부대를 격퇴하였다.

도성을 수복하기 위한 싸움터로 한강을 끼고 있는 행주산성을 골랐다. 1593년 병력을 나누어 선거이에게 금천[현 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한 뒤 2,8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의승병 1,000여 명과 합세하여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총퇴각을 위해 한양에 모인 3만의 왜군이 맹공격을 퍼부어 행주산성은 한때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권율의 통솔력과 관군, 의승병, 백성이 합심하여 왜군을 괴멸시켜 사상자가 2만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싸움이 행주대첩이다. 권율은 그 공으로 도원수(道元帥)에 올랐고, 호조 판서와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곧 한성부 판윤에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울산에서 대진하였으나 사령관 양호(楊鎬)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순천 예교(曳橋)에서는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8년(선조 36) 왜군이 스스로 물러나 정유재란은 끝이 났다. 1599년(선조 37) 병이 들어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

권율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번지에 있으며 1972년 5월 4일 경기도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권율의 묘는 묘역 제일 하단 꽃담장에 조선 기와를 올린 곡담 안에 있다. 3기의 봉분 가운데 중앙이 권율의 묘이고 왼쪽은 정경부인 죽산 박씨, 오른쪽은 정경부인 창녕 조씨의 묘이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헌종 7) 행주 한강나루터에 권율을 제향하기 위해 기공사(紀功祠)[현 행주서원]가 건립되었다. 같은 해 임금이 사액을 내렸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다. 비문이 닳아 1861년(철종 12) 권율의 9세손 권익(權益)이 다시 세운 것으로,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이유원(李裕元)이 글씨를 쓰고 새겼다.

행주산성 안에는 1603년(선조 36)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행주대첩비는 행주서원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1970년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를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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