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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773
한자 金炳始
이칭/별칭 성초(聖初),용암(蓉庵),충문(忠文)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32년연표보기 - 김병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5년연표보기 - 정시문과 을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60년연표보기 - 홍문관 교리
활동 시기/일시 1863년연표보기 - 이조 참의
활동 시기/일시 1865년연표보기 - 병조 참의
활동 시기/일시 1869년연표보기 - 형조 참판, 의금부사
활동 시기/일시 1870년연표보기 - 공충도 관찰사
활동 시기/일시 1874년연표보기 - 도승지
활동 시기/일시 1875년연표보기 - 형조 판서, 우참찬
활동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도총관, 병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877년연표보기 - 우포도대장, 선혜청 당상, 도통사
활동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총융사, 어영대장, 이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879년연표보기 - 규장각 제학, 호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공조 판서, 관상감 제조
활동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예문관 제학, 변리통리내무아문, 독판군국사무
활동 시기/일시 1883년연표보기 - 진주사, 선혜청 당상, 예조 판서, 호조 판서
활동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우의정, 판중추부사, 의정부 좌의정, 충리내무부사
활동 시기/일시 1886년연표보기 - 「논시폐수차」 올림
활동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논전폐계」 올림
활동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영의정
활동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궁내부 특진관
활동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내각 총리대신
활동 시기/일시 1897년연표보기 - 의정부 의정, 산릉석의중수도감 도제조
활동 시기/일시 1898년연표보기 - 산릉석의중수도감 도제조
몰년 시기/일시 1898년 7월 26일연표보기 - 김병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03년연표보기 - 묘갈 건립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묘소|단소 묘소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그루고개로[가납리]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내각총리대신

[정의]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병시(金炳始)[1832~1898]는 문호 개방과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이후 1895년 을미사변 등 우리나라 근대의 격동기에 정부의 중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온건과 보수의 길에 서서 개량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가로 일관하였다. 특히 갑신정변을 주도한 혁명 세력은 물론 온건 개화 세력 등과도 정치적으로 대립한 보수주의자였다. 조선 근대 정치사에서 언제나 민족주의적 입장을 지킨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정치가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성초(聖初), 호는 용암(蓉庵). 고조할아버지는 찬성에 추증된 김달행(金達行), 증조할아버지는 찬성에 추증된 김이경(金履慶),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된 김명순(金明淳)이며, 아버지는 공조 판서로 청헌(淸憲)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추증된 의석(宜石) 김응근(金應根)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이조판서 남릉군(南綾君) 홍종서(洪鍾序)의 딸이다. 아들은 비서승을 지낸 김용규(金容圭)이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군수 김택규(金宅圭), 참봉 김복규(金宓圭)이고, 딸은 서상윤(徐相允)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김병시는 183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훈국금위종사관(訓局禁衛從事官), 선전관, 성균관 전적, 정언, 병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교리, 이조 참의, 병조 참의, 예조 참판, 의금부사를 지냈다. 이후 외직인 공충도 관찰사를 거쳐 도승지, 형조판서, 예조판서, 우참찬, 병조판서, 우포도대장, 선혜청 당상, 도통사(都統使), 총융사 어영대장, 지삼군부사, 이조 판서, 규장각 제학, 호조 판서 등을 지냈다.

1882년에는 예문관 제학, 변리통리내무아문사(辨理統理內務衙門事), 독판군국사무(督判軍國事務) 등 문무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동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호조 판서에서 물러났다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텐진[天津]으로 납치된 후 복관되었고, 일본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가 군대를 끌고 인천으로 들어와 임오군란의 책임을 추궁하며 조선 정부를 괴롭힐 때 지삼군부사로서 종사관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협상에 나섰다.

청나라 장군 오장경(吳長慶)이 임오군란을 주도한 군부대의 집단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불시에 습격하여 군인과 가족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청군 책임자를 찾아가 무고한 양민은 해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1883년(고종 20) 1월 진주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양향 당상 선혜청 제조(糧餉堂上宣惠廳提調),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金玉均) 일파를 몰아내고 심순택(沈舜澤) 내각의 독판교섭통상사무로 전권대신이 되어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통리군국아문의 우의정, 판중추부사, 의정부 좌의정, 총리내무부사를 지냈다. 1894년(고종 31) 청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6월 20일 영의정이 되었으나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출범하여 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얼마 후 갑오개혁을 위해 마련된 임시 최고 결정 기관인 군국기무처의 시강원 사, 중추원 의장을 맡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시행되자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단발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6년(고종 33) 고종이 궁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간 아관파천 직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이라는 새 국호와 함께 광무 정부가 출범한 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임명되었고, 1898년(고종 35) 흥선 대원군이 죽은 뒤 산릉석의중수도감도제조(山陵石儀重修都監都提調)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7월 26일 양주 석우병사(石隅丙舍)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1886년(고종 23) 상소문인 「논시폐수차(論時弊袖箚)」를 올렸다. 국가의 운영 비용을 줄이고, 조운(漕運)의 편의를 위한 화륜선(火輪船)의 구입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1888년(고종 25)에 올린 「논전폐계(論錢弊啓)」는 화폐 정책에 대한 비판과 당오전 같은 악화(惡貨)[실제보다 가치가 낮은 화폐] 발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용암집(蓉庵集)』이 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장례에 국왕이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던 일]하였다. 1903년(고종 40) 묘갈이 세워졌다. 비문은 조카 호조 참판 원임 규장각 대교 김종규(金宗圭)가 짓고, 손자 혜릉 참봉 김태진(金泰鎭)이 썼으며, 전면(前面)은 손자 김승진(金升鎭)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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