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46
한자 鄭光謙
이칭/별칭 사익(士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창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 정광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7년연표보기 -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9년연표보기 - 사릉참봉
활동 시기/일시 1744년연표보기 - 돈녕부 주부, 연산 현감
활동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기로소에 들어감
몰년 시기/일시 1763년연표보기 - 정광겸 사망
묘소|단소 정광겸 묘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 1104[산북동 산92]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온양
대표 관직 강화부 경력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온양. 자는 사익(士益). 할아버지는 인제 현감으로 이조 참의에 추증된 정정양(鄭正陽)이고, 아버지는 정선 군수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정수곤(鄭壽崑)이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로 예조 참의 홍주국(洪柱國)의 딸이고, 부인은 양주 조씨로 군수 조태휘(趙泰彙)의 딸이다. 아들은 유생 정창언(鄭昌言)과 이조 참판에 추증된 군수 정창유(鄭昌兪), 좌찬성에 추증된 정창사(鄭昌師)이다. 손자는 이조 참판으로 우의정에 추증된 정민시(鄭民始)다.

[활동 사항]

정광겸(鄭光謙)[1689~1763]은 어려서부터 문학과 예술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1717년(숙종 4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39년(영조 15)에 사릉 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 상서원 부직장을 지냈다. 그 후 돈녕부 주부로 승진하였고, 공조 좌랑으로 연산 현감을 지냈다. 1744년(영조 20) 돈녕부 주부에 이어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단양 군수로 나갔다. 전생서 주부에 이어 면천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 장악원 첨정, 선혜랑, 강화부 경력을 지냈다. 1763년(영조 39) 75세 때, 영조의 고희[70세]를 맞이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통정대부 품계를 받았다.

[묘소]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92번지[평화로 1104]에 있다. 무덤 아래에 1795년(정조 19)에 건립된 묘갈이 있다. 정광겸 묘갈(鄭光謙墓碣)은 손자 정민시가 비문을 짓고 정치우(鄭致愚)가 글씨를 썼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