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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886
한자 黃璡
이칭/별칭 경미(景美),서담(西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도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2년연표보기 - 황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4년연표보기 - 별시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의주 목사
활동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공조 참판
활동 시기/일시 1594년 6월연표보기 - 전주부 윤
활동 시기/일시 1595년연표보기 - 의주부 윤
몰년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황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6년연표보기 - 영의정에 추증됨
묘소|단소 황진 묘 - 경기도 양주시 남방동 산31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원
대표 관직 예조판서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창원.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 증조할아버지는 황징(黃澄), 할아버지는 황준원(黃俊源), 아버지는 황탕경(黃湯卿)이다. 어머니는 오결(吳潔)의 딸이다. 부인은 이형성(李亨成)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황진(黃璡)[1542~1606]은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4년(선조 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한림, 홍문관 사인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주 목사로서 의주(義州)에 피란 온 임금을 모셨다. 1593년(선조 26) 공조 참판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하고 돌아왔다. 동년 11월 다시 원군을 청하기 위해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파견되었으나 국경에서 지체하다가 임의로 봉황성(鳳凰城)에서 발길을 돌려 용천(龍川)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명나라 원군이 늦게 도착하여 문책을 당했지만 가벼운 벌로 끝났다.

1594년(선조 27) 6월 전주부 윤(全州府尹)으로 나갔으나 전주의 수비를 감당할 인물이 못 된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95년 의주부윤이 되고,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 원병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이후 부호군, 형조 판서·공조 판서, 우참찬, 판중추부사,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황진은 인망은 부족했으나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왕을 모시면서 좋은 인상을 준 덕에 명나라 원병의 출병과 관련하여 중대한 실책이 있었음에도 비교적 안정적인 관직 생활을 하였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는 대명 관계에서 활약이 컸다.

[학문과 저술]

평안도 안주(安州)와 의주의 선위사(宣慰使)로 재임할 때 지은 38수의 시가 담긴 『서담공서정록(西潭公西征錄)』이 전한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남방동 산31번지에 무덤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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