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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09
한자 姜基東
이칭/별칭 강기주(姜基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3월 5일연표보기 - 강기동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의병장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0년 2월 - 포천에서 왜병과 접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3월 6일 - 영평에서 이용규 등과 함께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10년 4월 29일연표보기 - 양주에서 적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5월 16일연표보기 - 양주 노원에서 적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5월 27일 -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 도주
활동 시기/일시 1911년 2월 12일 - 원산에서 체포됨
몰년 시기/일시 1911년 4월 7일연표보기 - 강기동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활동지 경기도 양주
활동지 경기도 포천
활동지 황해도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214]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본명은 강기주(姜基周). 아버지는 강준복(姜俊福)이다.

[활동 사항]

강기동(姜基東)[1884~1911]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을 규합하여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 뒤 일본 헌병대를 찾아가 위장 귀순하여 경기도 장단(長湍)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각지의 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기회를 노렸다.

일제에 의하여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뜻있는 많은 의사들은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되지 않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의병들은 정규군인 관군과 일군에 의하여 속속 체포되어 사살당하였다.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 고랑포에는 이렇게 의병 투쟁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는데, 강기동은 숙직을 기해 동지들을 탈출시키고 무기 및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 운동을 재개하였다.

1907년 의병장이 된 강기동은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으며, 주로 양주(楊州) 포천(抱川)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연기우(延基羽)·전성서(田聖瑞)·이한경(李漢京) 등이 강기동의 주변 일대, 특히 경기도의 양주 포천을 위시하여 삭령(朔寧)·마전(麻田), 황해도의 토산(兎山)·금천(金川)·재령(載寧)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는데, 강기동은 이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전략을 전개하였다.

1908년(순종 2) 3월 강기동은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병사를 모아 대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하면서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과 함께 격문을 띄우기도 하였다. 동년 10월 22일 포천으로 들어간 강기동 의병 부대는 1910년 2월 포천에서 왜병과의 접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강기동 의병 부대의 좌군인 전성서 아래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은 포천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죄 선고를 받았다.

1910년 3월 6일 영평(永平)으로 들어간 강기동이용규 등과 같이 활약하였는데, 일본인들은 강기동이용규의 현상금을 1,000냥으로 올리며 이들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강기동은 4월 29일 양주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는데 전성서와 함께였다. 양주 노원(盧原)에서 5월 16일 교전하던 강기동은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 체포되었다. 하지만 강기동은 순사를 넘어뜨리고 도피하였으며, 다시 병력 100여 명의 의병 부대를 거느리고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강원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일제는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 경찰대의 연합 병력으로 경상도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安東)·예천(醴泉)·영춘(永春)·봉화(奉化) 일대에 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 후 시점인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친 기간이었다. 강기동은 1910년 9월부터 11월까지 황해도에서 작전을 펼쳤는데, 일제 또한 9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이르는 40일간 황해도 내 1개 여단(旅團) 병력을 집중하여 대살육 작전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 계몽 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면서 아울러 의병 부대에 대한 소탕 작전도 함께 전개하였다. 사태가 급진전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이 이동하였다. 강기동 또한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북간도로 이주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12일 원산(元山)에서 체포되었다.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 경무총감부에 수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를 묵자(墨子)하고 옥중 항쟁을 하다가 4월 7일 서울 용산(龍山)의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자리한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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