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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40
한자 王會鍾
이칭/별칭 왕영종(王榮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연천에서 의병 봉기
활동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조인환·권준·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 활동 전개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11일~13일연표보기 - 의병 활동을 위해 장정 400명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27일연표보기 - 왕회종 의진과 일본군 전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28일연표보기 - 적군 철수
활동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임진강 일대 연합 의진에 편입됨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연천군
활동지 경기도 양주
활동지 경기도 파주
활동지 경기도 적성
활동지 중국 만주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명은 왕영종(王榮鍾)이며, 경기도 연천 출신이다.

[활동 사항]

왕회종(王會鍾)은 1905년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며 1906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김진묵(金溱默)을 부장으로 5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군과 유격전을 전개해 북으로 진격하여 혜산진(惠山鎭)까지 올라갔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비밀리 교환된 각서에 따라 8월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조인환(曺仁煥)·권준(權俊)·김진묵 등과 함께 1,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기도 양주·파주(坡州)·적성(積城)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왕회종은 일본이 파견한 보병 제51연대 다나베[田邊] 대위가 인솔하는 보병 1중대와 산포병 1소대, 공병 1분대, 보병 제52연대 1중대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게 되었지만 재빨리 벗어났다. 특히 적성·삭령(朔寧)·안협(安峽)·토산 등지에서 9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활약하면서 장정 400명을 모집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은 기차 편으로 금천(金川)에서 평양(平壤) 보병 제52연대 제4중대장 우에다[上田] 대위로 부하 1소대를 인솔하게 하였다. 또한 같은 중대에서 신계(新溪)에 파견된 나카무라[中村] 소대에게 시변리(市邊里)를 경유해 토산으로 나아가 우에다 부대와 합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 없이 우에다 대위가 인솔하던 일본군은 25일까지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의병 부대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토산·안협 등지로 왕회종 의병 부대의 뒤를 쫓았으나 나카무라 부대 역시 그대로 귀환하였다. 이에 이들은 21일 경성을 떠나 23일에 토산에 도착하는데 이는 경성 보병 제50연대 제7중대가 금성(金城) 수비를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왕회종 의병 부대의 100명과 접전하기 위해 24일 의병 부대를 향하여 철원 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의병 부대에 협조하였던 석교촌은 적에 의하여 소각되고 전사자가 14명이 발생하는 등 아군의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왕회종 의병 부대가 재빨리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 25일에 적군이 철원에 도착하였다.

의병 부대는 철원 남쪽 심원사(深源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정보를 입수한 보병 제150연대 제6중대 1소대와 시로이[白井]의 중대가 연합하여 심원사에 접근하여 26일 밤 포위를 하였다. 드디어 27일 새벽 3시에 의병 150여 명과 법화동(法化洞)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 아군 2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적군이 심원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본진은 이미 절에서 철수한 뒤였다. 다시 오후 3시에 대광리(大光里) 동북방에서 의병 부대 중 250명이 적과 접전을 하였는데 당시 아군의 피해는 80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8일에는 철원 일대에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였다.

10월에 왕회종 의병 부대는 춘천(春川)·낭천(狼川)·양구(楊口)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경원가도의 동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의병 부대의 활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은 경성 보병 제55연대 제5중대의 기병·공병 약간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런한 투쟁은 1908년에 들어서면서 계속될 수 없었고, 이들은 허위(許蔿)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임진강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1월 말에 서울 12㎞[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던 13도 연합 의진의 총대장 이인영(李麟榮)이 문경으로 돌아간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일대에서 자리 잡고 있던 왕회종 의병 부대도 연합 의진에 편입되어 활동 무대를 넓히게 되었다.

이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연합 의진을 계획하면서 대외적으로 중국 혁명당과의 제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던 연합 의진은 6월 11일 총대장 허위가 체포되어 10월에 순국하자 독자적인 의병 부대 구성으로 흩어졌다. 만주로 망명한 후 청년 교육에 힘쓰던 왕회종은 의병 운동 중에 당한 부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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