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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49
한자 尹喜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연표보기 - 윤희섭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5월연표보기 - 군자금 및 군량미 모집
활동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친일 분자 처단
활동 시기/일시 1910년 6월 6일연표보기 - 경기도 영평군 이동면에서 의병 자금 징수
활동 시기/일시 1911년 4월 10일연표보기 -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음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활동지 경기도 장단
활동지 강원도 평강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윤희섭(尹喜燮)[1882~?]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윤희섭은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 회복 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어서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체결되는 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8월에는 군대까지 해산되는 등 조선이 준식민지 상황이 되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 의병 전쟁에 참여할 기회를 엿보던 윤희섭연기우(延基羽)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경기도 장단, 강원도 평강 등에서 활약하였다. 윤희섭연기우 의병 부대에 들어간 이래로 군자금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1908년 4월 동료 의병들과 함께 강원도 평강군 장북면 항동리에 들어가 친일 부호인 윤중호(尹重好)에게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1908년 5월 동료 의병 7명과 함께 무기를 소지하고 강원도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에 가서 친일 부호인 신용서(申龍西)에게 군량미를 거두기도 하였다. 1909년 3월에는 동료 의병 30명과 함께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 운정리에 가서 친일 부호 황무경(黃武卿)에게 군자금을 거뒀으며, 1910년 6월 6일에는 동료 의병 6명과 함께 경기도 영평군 이동면[현 포천시 이동면]에 가서 친일 면장 이정의(李鼎儀)에게 의병 자금을 징수하였다.

윤희섭은 친일 분자에 대한 처단 활동도 하였다. 1908년 1월 상순 연기우 의병장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 외북면 계류리[현 포천시 신북면 계류리] 조종학(趙鐘鶴)의 집에 머물었을 때, 박선국(朴善國)이라는 자가 연기우 의병장의 행동을 일제 관헌에게 밀고함을 감지하였다. 윤희섭은 박선국이 밀정(密偵)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집 밖으로 끌고 나와 처단하였다. 또한 그해 9월 25일 인천에 사는 이천식(李天植)이 일제의 밀정임을 확인하고 백광업(白光業)의 집에서 동료 의병들과 이천식을 잡아 처단하였다.

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전개된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점차 의병 전쟁이 쇠퇴해졌다. 그러나 윤희섭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연기우 부대에서의 의병 활동을 지속하다가 체포되어 1911년 4월 10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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