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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67
한자 錢鎭漢
이칭/별칭 우촌(牛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11월 5일연표보기 - 전진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8년연표보기 -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6년 6월연표보기 - 협동조합운동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조선경제』 발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5월 7일연표보기 - 신간회 동경지회 총무간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7월연표보기 -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2년간 복역
활동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흥국사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신민당 노동부위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 제헌국회 의원 당선
활동 시기/일시 1948년연표보기 - 초대 사회부장관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49년연표보기 -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52년연표보기 - 제2대 국회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제3대 국회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제5대 국회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제6대 국회 의원
활동 시기/일시 1965년연표보기 - 민정당 부총재
몰년 시기/일시 1972년 4월 22일연표보기 - 전진한 사망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
거주|이주지 서울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동경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일영리 산33-1]지도보기
성격 사회운동가|정치가
성별
대표 경력 민정당 부총재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사회운동가이자 정치가.

[가계]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우촌(牛村). 아버지는 전경준(錢京俊)이고, 어머니는 박성악(朴城岳)이다.

[활동 사항]

전진한(錢鎭漢)[1901~1972]은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 고향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월반하여 1917년 4학년 때 서울로 올라갔다. 하숙집 사환과 학교 급사 등의 일을 하고,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한용운(韓龍雲) 주위에서 심부름을 하며 고학하였다.

1920년 5월 안희제(安熙濟)가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동경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22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과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유학 시절에 반제국주의적 경제 조직체인 한빛을 조직하고 이선근(李瑄根)·이하윤(李河潤)·권오익(權五翼)·유동진(柳東璡)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6년 6월에는 한빛의 동지 10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한국 최초의 협동조합 운동 단체인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조선경제』를 발간하였다.

1927년 초 일본 동경의 성석고등여학교(城石高等女學校)에서 한국인 여학생에 대한 차별 사건이 발생하자 재일노총(在日勞總)·재동경조선청년동맹(在東京朝鮮靑年同盟) 등 12개 단체와 함께 성명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3월 서울로 와서 신간회(新幹會) 본부와 협의한 후 동경으로 돌아가 신간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동년 5월 7일 신간회 동경지회를 조직하고 총무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7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2년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에도 수차례 구금되었다. 이후 함경남도 갑산의 사립 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해직되었으며, 금강산과 오대산 등지에서 광복 때까지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전진한은 정당 활동 및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전진한의 활동은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고 반공 활동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처음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한국민주당 발기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유진산(柳珍山)·김산(金山) 등과 흥국사(興國社)를 조직하였고, 신민당(新民黨)이 결성되자 노동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가칭 대한민국임시정부지지 청년운동후원회를 조직하였고,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의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협동조합운동사 재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노동부장과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1948년에는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1949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을 창립하였고, 런던 대회에 참가하여 이사로 발탁되었으며,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의 아시아 지구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아시아 지구 대회의 상임이사가 되었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제2차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아시아 지구 대회에서 다시 이사로 선임되는 등 국제 노동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전진한은 1952년 제2대 국회 의원이 되었고, 1954년에는 제3대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에는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반대하여 노농당(勞農黨)을 창당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국가보안법개악 반대투쟁위원회, 1959년 민권수호국민총연맹과 전국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의 재야 세력과 정치 활동을 같이하였다. 동년 전진한은 민족주의민주사회당과 한국사회당을 결성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 의원을 지냈고, 1963년 민정당(民政黨) 발기에 참여하였으며 제6대 국회 의원이 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운동투쟁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1964년 한국민주통일국민협의회에 참여하여 통일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전진한은 남북통일이 되려면 우리 민족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민족 주체사상이 확립되어야 하고, 이 주체사상을 실현해야 비로소 공생공영할 수 있는 복지 사회가 건설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북한의 전체주의·공산주의와 남한의 개체주의·자본주의를 지양하고, 통일된 사상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복지가 서로 조화되는 사회로서 자유와 빵이 동시에 보장되는 진정한 복지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진한은 복지 사회 건설을 위한 이념으로서, 또 전체와 개체가 통일 조화되는 사상으로서 자유 협동주의를 내세웠다. 이 사상의 실현은 일제의 자유, 특히 사상의 자유가 박탈당한 북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남한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진한은 남북통일의 구심점이 남한에 구축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965년 민정당 부총재가 되었고 통합 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지도위원을 지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며, 1972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건국이념』·『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新構想)』·『민족위기와 혁신세력』·『자유협동주의』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33-1번지에 위치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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