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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68
한자 鄭用大
이칭/별칭 중범(重凡),의암(毅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2월 28일연표보기 - 정용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27일연표보기 - 이은찬 의병 부대와 함께 경기도 양주군 석적면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3월 2일연표보기 - 양주군 회암면 율정리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연표보기 - 군자금 모금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8년 6월 8일연표보기 - 부평군 내면 습격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0월 28일연표보기 - 정용대 체포됨
몰년 시기/일시 1910년 1월 26일연표보기 - 정용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85년 11월연표보기 - 의암정용대장군묘비 건립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7월 24일 - 한일 신협약 체결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07년 8월 1일 - 한국 군대 강제 해산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활동지 경기도 양주시 회천동
활동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묘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범(重凡), 호는 의암(毅庵). 양촌공파(陽村公派) 21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의병 정인태(鄭寅泰)이며,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이다. 어머니는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다. 부인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용대(鄭用大)[1882~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7월 24일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군에서 특무정교(特務正校)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 해산 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장군(倡義左將軍)이 되었다. 정용대는 무장한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경기도 양주를 비롯하여 적성·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인근 일대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의병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2월 27일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와 함께 양주군 석적면[현 양주시 광적면]에서, 3월 2일에는 양주군 회암면 율정리[현 양주시 율정동]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4월 12일 부하 신관수로 하여금 통진군 수곡리[현 김포시 통진읍]의 김화안으로부터 군자금 10원을 조달하게 하였다. 4월 23일에는 부하 이종근 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1만 5000냥의 군자금과 군도 한 자루를, 양릉면 곡촌[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군도 두 자루를, 교하군[현 파주시 교하읍]에서 양총 7자루와 탄환 900발, 군도 4자루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전력을 크게 보완하였으며, 고을 사람 조운원 등과 연락하여 일본 헌병과 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1908년 5월 20일경에는 신관수로 하여금 교하군 문발리[현 파주시 교하읍] 민영도의 집에 들어가 총기 두 자루와 탄환 100발을 조달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활동 영역을 넓혀 경기도 강화군에서 군자금과 군량미를 확보하게 하였다. 6월 8일 경기도 부평군 내면[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을 습격하였으나 순사 3명과 수비대 13명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체포되었으며, 무기 9정을 빼앗기고 패퇴하였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소규모로 정예화하여 양주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펼치자, 일본군은 300명의 병력을 양주에 집결시켜 집중 공세를 가해 왔다. 이때 양주에서 함께 항일 투쟁을 펼치던 의병장 윤인순(尹仁淳)이 3월 19일 적성에서 전사하였고, 이은찬도 3월 3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정용대 의병장은 풍덕군[개성직할시 풍덕군]에서 진을 치고 “이은찬, 윤인순 두 대장을 잃었으나 우리 의병은 좌절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여 일본의 압박을 제거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여 반드시 그 뜻을 관철할 것”이라고 재천명하고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용대 의병 부대는 한말 의병사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자금 모금으로 유명한데, 이종근(李宗根)·신관수(申寬秀)·박만안(朴萬安)·백영현(白永賢)·이학선(李學善) 등의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군자금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정용대는 계속하여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면서 전투를 준비하다가 1909년(순종 3) 10월 28일 체포되었다.

정용대는 체포된 후 일본군의 심문에 당당하게 응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심문을 받는 동안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붙잡혔으니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며, “살기를 도모하다가 대한의 흥황복조(興皇復朝)를 손상하면 도리어 신자(臣者)의 도리가 되지 않는다”고 한 구절에서 그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정용대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1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 11월 의병장 정용대의 뜻을 널리 기리기 위하여 의암정용대장군묘비(毅庵鄭用大將軍墓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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