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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삼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84
한자 秋三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추삼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8월연표보기 - 양주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연표보기 - 이재학 휘하에서 무장 투쟁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8일[음력]연표보기 - 친일배 김영덕 집 습격
활동 시기/일시 1907년 9월 9일[음력] - 김영덕·이승녕 처형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2월 21일연표보기 -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추삼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거주|이주지 경기도 동두천시 하봉암동
활동지 경기도 적성군
활동지 경기도 삭녕군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추삼만(秋三萬)[1880~1910]은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현 양주시 회암동] 출신으로, 이담면 하봉암리[현 동두천시 하봉암동]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분노한 추삼만은 같은 해 8월 황재호(黃在浩) 의병 부대에 들어가 의병 20여 명과 함께 양주군 웃사야위마을에서 군자금 100냥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의병장 이재학(李在學) 휘하로 옮겨 적성군과 삭녕군 일대에서 무장 투쟁을 하던 중, 삭녕군 남면 귀존리 양지동에 거주하는 일진회원 김영덕(金永德)과 이승녕(李承寧)을 처단하기 위하여 9월 8일[음력] 밤 의병 30여 명과 함께 김영덕의 집을 습격 포박하였고, 담을 넘어 도주하는 이승녕에게 발포하여 다리에 관통상을 입히고 사로잡았다.

9월 9일 아침 추삼만은 이재학의 명령을 받고 두 친일배를 처형하였다. 그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추삼만은 1909년 12월 2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와 고살죄(故殺罪)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15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됨으로써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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