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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992
한자 李英燮
이칭/별칭 한국의 칸트,도시락 판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광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9년 11월 5일연표보기 - 이영섭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2년연표보기 - 전라남도 광주보통학교를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경성대학 법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경성지방법원 판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서울고등법원 판사 승진
활동 시기/일시 1950년연표보기 -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2년연표보기 -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 교수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하버드대학교에서 소송법 연구
활동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9월 1일연표보기 - 대법원 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79년 3월 21일연표보기 - 제7대 대법원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81년 4월 15일연표보기 - 제7대 대법원장 사임
활동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동대문합동법률사무소 개업
활동 시기/일시 1987년 2월연표보기 - 인권보호특별위원회 위원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안중근 의사 사업추진위 고문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94년 12월연표보기 - 북한인권개선운동본부 고문 취임
몰년 시기/일시 2000년 10월 11일연표보기 - 이영섭 사망
출생지 경기도 양주시 남면 한산리 595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학교|수학지 광주보통학교 - 전라남도
활동지 서울특별시
묘소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산2-1 지도보기
성격 법조인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경력 대법원장

[정의]

경기도 양주 출신의 법조인.

[가계]

본관은 전의. 아버지는 이상익이고 동생은 이웅섭이다. 아버지 이상익은 남면사무소에서 초대 남면장을 지냈다. 부인은 평택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권태옥(權泰玉)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영섭(李英燮)[1919~2000]은 1919년 11월 5일 경기도 양주시 남면 한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아버지 이상익이 광주법원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1932년 전라남도 광주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경성대학[현 서울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그해 일본 고문사법과(高文司法科) 사법관 시보[경성지방법원]에 합격하였다. 1945년 경성지방법원 판사에 취임하고 1947년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하였으며, 1950년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다.

이영섭은 6·25 전쟁으로 인한 격변기에 평소에 관심이 있던 「민사소송법」 학계로 진출하여 우리나라 「민사소송법」 제정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국내 「민사소송법」 분야의 실질적인 기초를 닦았다.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 교수에 취임하고, 1957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경학회(燕京學會) 초청으로 같은 대학 법과대학에서 「소송법」을 연구하였다. 1960년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을 역임하는 등 후배 법조인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61년 9월 대법원 판사에 기용되었다. 1979년 3월 21일 국회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임명 동의를 요청한 이영섭 대법원장의 임명 동의안을 의결함으로써 제7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대법원장 재직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金載圭)에 대해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닌 단순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소수 의견을 내놓은 대법관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이른바 ‘사법 살인’이 자행되었는데, 그 직후 재임 25개월 만인 1981년 4월 헌법 개정과 함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중하차하였다. 대법원장 퇴임사에서 이영섭은 ‘사법부(司法府)’를 일개 부처인 ‘사법부(司法部)’로 비유하면서,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이 퇴임사에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사법부에 대한 통한의 심경이 담겨 있어서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었다.

1982년 동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판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상고심 사건만을 수임하는 등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고집해 법조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1987년 2월 인권보호특별위원회 위원장, 1992년 안중근의사사업추진위 고문, 1994년 12월 북한인권개선운동본부 고문, 국정 자문 위원을 거치는 등 인권 보호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영섭의 일상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라 ‘한국의 칸트’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으며, 저서 『민법총칙(民法總則)』과 『민사소송법(民事訴訟法)』은 법대생과 사법 시험 준비생의 필독서가 되었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영섭은 역대 최장수 대법관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1961년 9월 1일 대법원 판사로 부임하여 1979년 3월 21일에는 대법원장이 되고, 그 후로 1981년 4월 15일까지 계속 활동함으로써 총 19년 8개월간 대법원에서 일하였다. 2000년 10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민법총칙』[1948~1960], 『신민사소송법』 상·하[1950~1968], 『민사소송법』, 『신민법대의(新民法大意)』, 『체계 민사소송법』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산2-1번지에 있다. 2011년 현재 한산리 595번지이영섭 생가에 육촌 동생 이경섭이 살면서 묘소를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황** 이 시대에 가장 양심적이고 공정한 법관으로 인간의 사표가 되시는 분이나, 말년에 군부독재에 의한 사법권침해로 많은 심적고통을 받으셨던 대법원장님께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20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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