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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006
한자 選擧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염일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양주시 선거관리위원회 - 경기도 양주시 고읍남로 6-9 드림월드타워 2층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서 선거권을 가진 지역 주민이 공직에 임할 사람을 투표로 선출하는 일.

[개설]

현재 한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주요 공직 선거로는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권의 수반이 되는 최고의 통치권자인 공화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국회의 구성원이 되는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국회 의원 선거, 「지방 자치법」에 따라 지방 의회 의원 및 지방 자치 단체의 장을 선출하는 지방[광역 자치 단체와 기초 자치 단체] 선거 등이 있다. 양주시 지역의 공직 선거도 이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2003년 10월 19일 시로 승격된 이후 양주시에서 실시된 선거는 크게 대통령 선거, 국회 의원 선거, 지방 자치 단체 선거 등이 있었다.

[대통령 선거]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7월 20일 실시된 초대 정·부통령 선거는 국회 의원들에 의한 간접 선거로 실시되어 재적 의원 198명 중 196명이 투표한 가운데 이승만(李承晩)이 180표를 획득하여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2년 8월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군 유권자들은 전국 투표율 88%보다 훨씬 높은 95.7%의 6만 265명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가하였으며, 총 투표자의 89%가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군 유권자들은 전국 투표율인 94.4%와 비슷한 96.6%가 투표에 참가하였다. 그 중 총 투표자의 78.5%가 이승만을, 21.5%가 조봉암(曺奉巖)을 지지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 입후보하였으며, 양주군 총 유효 투표자의 90%가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 시비로 인하여 4·19 혁명이 촉발되었고, 그 결과 그해 4월 26일 국회 결의에 의하여 모든 투표가 무효 처리되었다. 그 후 제2공화국 정부에서 내각 책임제로 권력 구조를 개편한 뒤 국회에서 새롭게 제4대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였는 바, 당시 윤보선(尹潽善) 후보가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권력 구조가 개편된 후, 1963년 드디어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양주군에서는 전국 투표율인 85%와 거의 비슷한 85.3%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 윤보선 후보가 58.7%의 지지율을 확보한 반면 공화당의 박정희(朴正熙) 후보는 31.5%의 지지율에 그쳤다. 이것은 당시 양주군민이의 투표 성향이 야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도시형에 가까웠으며, 군사 쿠데타에 대한 양주군민의 부정적 태도를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군의 투표율은 전국 투표율인 83.6%와 거의 비슷한 84.3%의 유권자가 참여하였다. 당시 양주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지지율은 46.4%, 민주당 윤보선 후보의 지지율은 47.6%로 근소한 표차를 보였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군의 투표율은 전국 투표율인 79.8%와 거의 비슷한 81.5%였다. 당시 양주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지지율은 49.8%, 40대 기수론을 기치로 내걸고 등장한 민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지지율은 48.2%로 근소한 표차를 보였다.

1972년 11월 21일 대통령 간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유신헌법이 공표되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99.9%라는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8년 7월 6일 대통령 선거에서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99.9%의 지지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사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후인 1979년 12월 6일 실시된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후보로 입후보한 최규하(崔圭夏) 후보가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 96.7%의 지지율을 얻어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0년 5·17 군사 쿠데타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全斗煥)은 최규하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그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99.9%의 지지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80년 새 헌법안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해산되고, 대통령 선거인단이 구성되어 실시된 제12대 대통령 선거는 1981년 2월 25일 실시되었다. 당시 민정당 전두환 후보가 전체 대통령 선거인단 중 90.2%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제12대 7년 단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그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양주군에서는 전국 투표율[89.2%]에 조금 못 미친 88.7%의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하여 노태우(盧泰愚) 후보 35.9%, 김영삼(金泳三) 후보 27.5%, 김대중 후보 26.5%의 지지율을 얻었으며, 그 결과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시 유권자들은 김영삼 후보 39%, 김대중 후보 33%의 지지율을 보여 주어 실제 선거 결과와 같은 지지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보다 이회창(李會昌)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더욱 높아, 실제 선거 결과와는 상반된 지지율을 보였다.

200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주시는 당시 실제 선거 결과와 같은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이회창 후보보다 많은 득표율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양주시에서는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완승을 거두었다. 양주시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50%가 넘는 득표율을 올려 실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 의원 선거]

국회 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전국의 총 200개의 선거구 중에서 치안 관계로 선거 실시가 보류된 북제주의 갑구·을구를 제외한 198개의 선거구에서 최초로 실시된 이래 2008년 제18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 의원 선거에서 양주군 갑구에서는 김덕열(金德烈), 양주군 을구에서는 이진수(李鎭洙)가 당선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양주군 갑구에 조시원(趙時元), 양주군 을구에 이진수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양주군 갑구에 김종규(金宗奎), 양주군 을구에 강승구(姜昇求)가 당선되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양주군 갑구에 강영훈(姜永薰), 양주군 을구에 강성태(姜聲邰)가 당선되었다. 1960년 7월 29일 4·19 혁명 이후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양주군 갑구에 강영훈, 양주군 을구에 강승구가 당선되었다.

1961년 5·16 정변 이후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의정부시·양주군에서 강승구가 당선되었다.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 의원 선거의 의정부시·양주군 선거구에서는 이진용(李珍鎔)이 당선되었다. 1971년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의정부시·양주군 선거구에서는 이윤학(李允學)이 당선되었다. 1973년 2월 27일 유신헌법에 의한 제9대 국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당시에는 1선거구에서 2명의 국회 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였다. 의정부시, 양주군, 파주군으로 구성된 제3선거구에서는 박명근(朴命根)이진용이 당선되었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박명근과 김형광(金炯光)이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15일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실시된 제11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의정부시와 양주군이 포함된 제5선거구에서 홍우준(洪禹俊)과 김문원(金文元)이 당선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의정부시, 동두천시, 양주군이 함께 선거구가 되어 홍우준과 김형광이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의 이덕호(李德浩)가 당선되었다.

1992년 3월 24일 3당 합당 이후 거대 정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된 이후 실시된 제14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동두천시, 양주군에서 임사빈(任仕彬)이 당선되었다.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제15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목요상(睦堯相)이 당선되었고, 2000년 4월 13일에 실시된 제1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목요상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4년 4월 15일 실시된 제17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정성호(鄭成湖)가 당선되었고, 2008년 4월 9일 실시된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는 김성수(金性洙)가 당선되었다.

[지방 자치 선거]

지방 자치 선거는 광역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 기초 지방 자치 단체장 선거, 광역 의회 의원 선거, 기초 의회 의원 선거 등 4대 선거로 실시되었다. 지방 자치 선거 중 가장 먼저 실시된 선거는 기초 지방 의회 의원 선거로 1991년 3월 26일에 실시되어 현재 민선 4기째를 맞고 있다.

1991년 3월 26일 실시된 기초 의원 선거는 광역 의원보다 3개월 먼저 실시되었다. 양주군 7개 읍면에서 권선안·안광순·우충국·한상익·이은선·김재현·정명훈·김혜한 등 총 8명의 군의원이 당선되었다. 광역 의회 의원 선거는 1991년 6월 20일 실시되었다. 양주시에서는 3개의 선거구에서 3명의 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제1선거구에서 김정근(金廷根), 제2선거구에서 송호근(宋浩根), 제3선구에서 김성수(金性洙)가 각각 당선되었다.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가 있었다. 이때 민선 1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이인제(李仁濟) 후보가 당선되었고, 민선 1기 양주군수 선거에서는 윤명노가 양주군수로 당선되었다.

1998년 6월 4일 민선 2기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임창열 후보가 약 10%의 우세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다. 한편 민선 2기 양주군수 선거에서도 윤명노가 당선되었다.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손학규(孫鶴圭) 후보가 58.4%를 득표하여 경기도지사가 되었고, 민선 3기 양주군수로는 임충빈 후보가 양주군수에 당선되었는데,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제1대 양주시장이 되었다.

2006년 5월 31일 시행된 제4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서 경기도지사는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양주시장에는 한나라당 임충빈 후보가 당선되어 민선 제2대 양주시장이 되었다. 2010년 6월 2일 시행된 제5회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는 김문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양주시장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현삼식 후보가 37.3%의 득표율로 제3대 양주시장에 당선되었다.

[선거구 현황]

2011년 현재 양주시의 선거는 양주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선거구 현황을 살펴보면 국회 의원의 선거 구역은 양주시와 동두천시, 도의원 선거구는 양주시 제1선거구[은현면, 남면, 회천2동, 회천2동, 회천3동, 회천4동], 양주시 제2선거구[백석읍, 광적면, 장흥면, 양주1동, 양주2동], 시군 의원 선거구는 양주시 가선거구[은현면, 남면, 회천1동, 회천2동, 회천3동, 회천4동], 양주시 나선거구[백석읍, 광적면, 장흥면, 양주1동, 양주2동]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양주시의 선거를 담당하는 양주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선거 관리, 지도·단속, 계도·홍보, 민주 시민 교육·선거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1명의 위원장과 1명위 부위원장,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선거에 대한 중요성과 참여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80% 정도의 투표 참여율이 있어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만큼 선거 결과가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모든 선거에 임하는 양주시민들의 정치적 판단이 자발적이고 소신 있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명백히 표에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를 통하여 민주적 정치 과정이 신뢰를 받는다면 선거 결과에 대하여 정당성을 인정받고 정부나 지도자가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이는 곧 국가의 경쟁력과 국제 사회에서의 신뢰를 얻어내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양주군지』 (양주문화원, 1992)
  • 양주시 선거관리위원회(http://yangju.gemc.go.kr/)
이용자 의견
N** 2020년에 맞게 수정해주세요.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은 수정증보 사업을 통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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