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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229
한자 烈女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만용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 출신이거나 양주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 남편을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돌보거나 남편에 대한 절개를 굳게 지킨 여자.

[개설]

열녀(烈女)는 위급하고 곤란한 경우를 당했을 때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킨 것을 말하며, 훌륭한 어머니, 지혜로운 아내, 효성스런 딸, 절의 있는 아내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열녀와 열부(烈婦)를 통칭한다. 『사원(辭苑)』에서 열녀는 혼인 전에 약혼자가 죽었을 경우 그 뒤를 따라 죽는 여자 및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강포자(强暴者)에 항거하는 미혼녀라고 하였고, 열부는 기혼녀로서 남편의 뒤를 따라 죽는 부인 및 목숨을 끊음으로써 강포자에 항거하는 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열녀 중에는 ‘마당과부’라는 것도 있는데, 어린 나이에 혼례만 치르고 미처 시댁으로 가기 전에 신랑이 죽는 경우의 여인을 말한다.

[배경]

고려 말에 주자성리학이 도입된 후 점차 주자학적 예속의 영향으로 여필종일(女必從一)이 지상계율로 권장되고 수절이 강조되기 시작하여 부녀자의 도리로서 조선 시대에 정착되었다. 전통 사회의 가족 제도는 철저한 가부장제 하에서 부모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혼인도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부모에 의하여 가문 위주로 결정되었으며, 부부 관계에서도 남편은 하늘이라 하여 남편을 취한 정절이 강조되어 삼강(三綱)에서도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烈女不事二夫]’는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큰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 시대에는 모든 과부를 열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열녀가 있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에게 가해진 규제와 장려 정책은 외출 및 남녀 교제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음행(淫行)에 대한 가중된 처벌, 삼강행실의 거듭되는 반포 및 이것의 교화, 열녀문(烈女門)을 내려 표창하는 등 다양하게 시행되었다. 열녀가 나오면 가문의 자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풍양속의 본보기로 높게 평가되었다. 경기도 양주도 많은 열녀를 배출한 지역이다.

[인물과 내용]

1. 목씨(睦氏) 부인

진사 김정화(金鼎和)의 며느리인 목씨는 혼인한 지 3일 만에 남편 김완(金浣)이 죽었다. 곧이어 시어머니가 자식이 먼저 죽은 것을 상심하여 큰 병이 들어 2년 동안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시아버지를 섬기며 살아가면서도 자식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아버지는 “네 시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아들을 낳으면 네 몫으로 정하겠다.”고 타일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시신의 얼굴빛은 산 사람과 같았고, 3개월을 빈소에 두었어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목씨의 효성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정문을 내렸다고 하는데, 그 자리는 알 수 없다.

2. 밀양 박씨(密陽朴氏) 부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남복흥(南復興)의 부인 밀양 박씨는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른 뒤,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시묘살이를 하였고, 대상(大祥)이 끝나자 목숨을 끊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1582년(선조 15)에 정문을 내려 포상하였다. 정문은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예전 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에 있다.

3. 박씨 부인

송계상(宋繼商)의 부인 박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애통해 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박씨의 효행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포상을 하고 효부 정문을 내려주었으며, 모든 부세(負稅)를 면제해 주는 은전을 베풀었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4. 수원 윤씨(水原尹氏) 부인

수원 윤씨는 무관 한진구(韓鎭九)의 아내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편이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타고 갔던 말이 홀로 돌아왔다. 수원 윤씨는 말을 향하여 “너는 어찌하여 주인을 모시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느냐, 네가 주인이 있는 곳을 안다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꾸짖으며 말에 올라탔다. 개성 쪽으로 말이 닿는 곳에 가서 보니 남편의 시신이 있었다. 시신을 안고 돌아와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고, 3년상을 마친 후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사실이 주위에 알려졌으며, 유림의 천거로 열녀 정문이 내려졌다.

5. 신씨(申氏) 부인

오두병(吳斗柄)의 부인 신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부모 봉양에 하루도 게으르지 않았다. 이러한 신씨의 효행이 주위에 알려져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으며, 조정에도 알려져 1716년(숙종 42) 효부 정문을 내렸는데,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6. 안산 김씨(安山金氏)·평산 신씨(平山申氏) 부인

안산 김씨와 평산 신씨는 유씨(柳氏) 집안에 시집온 동서 사이이다. 안산 김씨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지낸 유영겸(柳永謙)의 아내이고, 평산 신씨는 이조참판 유영순(柳永洵)의 아내이다. 이들 동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로 피난을 떠났다. 산길을 가던 중 포성이 들려 정신이 없는 중에 왜병을 만나게 되었다. 병사가 다가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안산 김씨는 품고 있던 장도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고, 평산 신씨는 옆에 있는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조정에서는 두 여인의 정절을 높이 사 1593년(선조 26)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의정부시 산곡동 593번지[예전 양주군 별내면 산곡리]에 있다. 의정부시 고산동 산166-2번지에 있는 평산 신씨의 묘 남쪽에 안산 김씨의 묘를 써 쌍절기(雙節基)라 부르며, 묘비 또한 쌍절비(雙節碑)라고 한다.

7. 우씨(禹氏) 부인

이중현(李重峴)의 아내인 우씨는 천성이 부드럽고 순하였으며, 말과 행동에도 법도를 지켰다. 집안이 가난하여 남편이 방아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전염병이 돌아 온 식구가 감염되어 시어머니가 먼저 죽고 남편도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우씨는 자신의 병을 돌보지 않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며일 후에 남편마저 숨을 거두자 정성으로 장례를 지내고 졸곡(卒哭)[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을 마친 뒤, 성묘 간다고 집을 나가 남편의 무덤 곁에서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8. 윤씨(尹氏) 부인

양주현감(陽州縣監)을 지낸 김계영(金啓永)의 부인 윤씨는 60년간 남편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남편이 죽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어 죄인을 자처하고 어둠을 틈타 물에 빠져 자결하였다. 70세의 노파로 남편의 뒤를 따른 열녀의 뜻을 기리어 예조에서 정문을 내렸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9. 이씨(李氏) 부인

여광억(呂光億)의 부인인 이씨는 효자로 이름난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잘 섬겼고, 남편에게도 잘하여 뭇 여인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남편이 죽자 한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애절해 하다가 곧 따라 죽었다. 주위에서는 효열(孝烈)이 같이 이루어졌다고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정문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0. 이씨(李氏) 부인

양주군 백석면 복지리[현 양주시 백석읍 복지리]에 살던 최이현(崔爾賢)의 부인 이씨는 어느 날 남편과 함께 홍복산에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남편을 물고 달아나자 비명을 지르며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호랑이는 시신을 놓고 이씨 마저 물려고 덤벼들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이씨는 죽은 남편을 끌어안고 인가 근처까지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이 그만 시체를 놓고 들어가라고 하니 “남편이 여기 있는데 어찌 차마 버리고 갈 수가 있겠느냐”고 통곡하며 시신을 지켰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열녀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1. 조 소사(趙召史)

양주의 향리였던 함사수(咸四壽)의 부인 조 소사는 일찍 남편을 여의었다. 수절을 아내의 덕목으로 믿고 겁탈을 두려워하여 항상 장도(粧刀)를 품고 지냈다. 하루는 이웃의 악한이 몰래 숨어들어와 겁탈하려고 하자 힘을 다해 물리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정문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2. 조씨(趙氏) 부인

조씨(趙氏)는 양주의 사족(士族)인 윤동상(尹東尙)의 아내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혼인을 한 지 몇 년이 안 되어 남편이 죽게 되자, 뒤따라 죽기를 작정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조씨는 친정으로 가서 두 달 동안을 지내며 부모를 안심시키고 시댁에 돌아와서는 자결의 뜻이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음독자살하였다. 나라에서는 장한 뜻을 기리어 정문을 내렸다고 『삼강록(三綱錄)』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3. 조씨(曺氏) 부인

가난한 선비 홍선영(洪善泳)의 아내 조씨(曺氏)는 방아품을 팔아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섬기었다. 어려운 생활 중에 남편이 병에 걸리자 조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시중을 들었고,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진단하였다. 깨끗이 목욕을 하고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도하였으나, 결국 남편의 상을 당하자 직접 수의를 만들어 입히고 모든 장례 절차를 지휘하였다. 발인 전날 새벽에 상식(上食)을 올리고, 시어머니에게는 진짓상을 올린 다음 골방에 들어가 약을 먹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정문이 내려졌으나,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4. 한양 조씨(漢陽趙氏) 부인

효부 한양 조씨는 17세에 홍문관교리 이윤겸(李允謙)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병환이 심하여 곧 운명하려고 하자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 회생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깊어 주위에서는 여자 중의 증자(曾子)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1832년(순조 32)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으나, 6·25 전쟁 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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