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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295
한자 裵湖
이칭/별칭 배신웅(裵信雄),배만금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정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42년 4월 24일연표보기 - 배호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서울 창신국민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6년연표보기 - 부산 삼성중학교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58년 - 김광배 악단, 김인배 악단에서 연주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굿바이」, 「사랑의 화살」 녹음
활동 시기/일시 1964년 - 1집 음반을 냄
활동 시기/일시 1967년 4월연표보기 - 『돌아가는 삼각지』 음반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69년연표보기 - TBC 남자 가수 대상,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 대상
활동 시기/일시 1970년연표보기 - MBC TV 10대 가수상, 서라벌 가요 대상 등 29개 부분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71년 7월 - 「마지막 잎새」, 「0시의 이별」 녹음
몰년 시기/일시 1971년 11월 7일연표보기 - 배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 11월연표보기 - 서울 삼각지에 배호길 조성
추모 시기/일시 2001년 11월 13일연표보기 - 서울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2년 4월 21일연표보기 - 묘지에 두메산골 노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3년 6월 22일연표보기 - 경주에 마지막 잎새 노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3년 7월 12일연표보기 - 주문진에 파도 노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3년 10월 20일연표보기 - 옥관문화훈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5년 5월 20일연표보기 - 『배호 평전』 출간
출생지 중국 산둥성 지난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거주|이주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
학교|수학지 창신국민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1동
학교|수학지 삼성중학교 - 부산직할시 사하구 감천1동
묘소 신세계공원묘원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33-1 지도보기
도로명 배호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삼각지
배호 노래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삼각지
배호 노래비 신세계공원묘원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33-1
배호 노래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
배호 노래비 아들바위공원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리
배호 노래비 인천 연안부두 - 인천직할시 중구 항동
성격 예술인|대중 가수
성별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무덤이 있는 대중 가수.

[개설]

본명은 배신웅(裵信雄), 호적상 이름은 배만금. 예명이 배호(裵湖)이다. 아버지는 광복군 출신의 배국민이고, 어머니는 김금순(金錦順)이다. 여동생은 배명신(裵明信)이다. 외가 쪽이 음악가 집안으로, 둘째 외삼촌 김광옥은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윤이상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였으며, 북경심포니교향악단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셋째 외삼촌 김광수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작곡자로,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바이올린 연주자로 초기 KBS 악단장을 지냈다. 넷째 외삼촌 김광빈은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자로, 초기 MBC 악단장을 지냈다.

[활동 사항]

배호[1942~1971]는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에 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1946년 4월경부터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81번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생활하였다. 1949년부터 1955년까지 서울 창신국민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란을 가기도 하였다. 1955년 서울 영창학교[성동중학교 전신]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부산으로 내려가 이모의 모자원에서 생활하면서 1956년 부산 삼성중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마쳤다.

이후 음악을 하기 위해 혼자 서울로 올라와 외삼촌 김광빈에게 드럼을 배웠다. 1958년부터 김광빈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였고, 1960년 부평 미군부대 캠프 마켓(Camp Market) 관할 클럽 등에서 2년간 악단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였다. 1963년 21세 때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 두 곡을 녹음하고, 예명을 배호로 지었다.

1964년 낙원동 프린스(Prince) 카바레의 밴드 마스터로 뽑혀 배호와 그 악단이라는 밴드를 꾸려 드럼을 치며 노래하는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반야월 작사 김광빈 작곡의 「두메산골」을 타이틀로 한 1집 음반 『황금의 눈』을 내고 공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1966년 신장염에 걸려 가을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청량리 단칸방에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신진 작곡가 배상태를 만나 배호의 대표곡이자 최대 히트곡인 「돌아가는 삼각지」를 녹음하여 1967년 4월 음반을 발표하였다. 특색 있고 호소력 깊은 음색 덕분에 「돌아가는 삼각지」가 전국 인기 순위를 휩쓸면서 배호는 정상의 인기 가수로 자리잡았다. 이어서 병석에서 발표한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연속 히트함으로써 인기 가수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68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등 인기 정상과 더불어 몸이 회복되면서 왕성한 가수 활동 시작하여 히트곡 「안녕」 및 주옥같은 번안곡 등 생애 최고로 활발한 활동과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인이 ‘내 생애 최고의 한 해’로 말할 정도로 전국적인 인기를 차지하였고, 1969년에는 TBC, KBS, MBC 등 주요 가요 가수상을 휩쓸었다. 이후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이 재발하여 다시 병원에 입원하였다.

1971년 7월 마지막 곡들인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을 녹음하였다. 명동 코스모스백화점 공연 중에 각혈로 퇴장하고, 동년 10월 20일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진행 이종환] 출연 후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동년 10월 30일 세브란스병원 입원 이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11월 7일 더 이상 가망이 없자 퇴원, 미아리 집으로 가던 중 의식 불명으로 자택에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1966년부터 1971년 세상을 뜰 때까지 왕성하게 음악 활동을 하여 약 5년 동안 300여 곡을 발표하였다. 음반은 독집 20여 장을 포함해 약 70여 종 정도이다. 대표곡으로는 「돌아가는 삼각지」·「안개 낀 장충단 공원」·「누가 울어」·「안개 속으로 가 버린 사람」·「안녕」·「한목숨 다 바쳐」·「당신」·「비 내리는 명동」·「마지막 잎새」·「0시의 이별」 등이 있다.

[묘소]

1971년 11월 11일 예총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가수협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지고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33-1번지 신세계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무덤은 묘원 관리사무실 입구에서 북향 좌측으로 20°도 가량 되는 지점이자 산 정상으로부터 두 번째 석축 아래 줄 노간주나무 근처이다. 배호의 묘 오른쪽에는 어머니 김금순의 묘가 있고, 왼쪽에는 여동생 배명신의 묘가 있다. 사각형 묘비에 「돌아가는 삼각지」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1969년에 TBC 남자 가수 대상,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 대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에는 MBC 10대 가수상, 서라벌 가요 대상 등 29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배호는 MBC TV 특집 여론 조사 가수 기여도 부분에서 1위로 선정되었고, 최초 가요 60년사 여론 조사에서 좋아하는 가수 1위로 선정되었으며, 『조선일보』 조사 건국 이후 음악 전문가 여론 조사[음악성] 가수 50명 중 6위를 차지하였다.

2000년 11월 배호의 팬들과 용산구민의 민원으로 용산구청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121번지~221번지 삼각지로터리 이면 도로를 배호길로 선정하였다. 대중 가수의 이름이 도로명이 된 것은 배호길이 처음이다. 2001년 11월 13일에는 삼각지로터리의 녹지에 「돌아가는 삼각지」의 가사를 새긴 배호 노래비를 세웠다.

2002년 4월 21일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에서 배호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묘에 두메산골 노래비를 건립하였다. 이 모임은 또 2003년 6월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에 마지막 잎새 노래비를, 7월에는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리 아들바위공원에 파도 노래비를, 2011년 11월에는 인천 연안부두에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가사를 새긴 노래비와 흉상을 세웠다. 2003년 10월 20일 옥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03년부터 배호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05년 5월 20일 소담출판사에서 『배호평전』이 출간되었다.

[참고문헌]
  • 김선영 저, 『배호평전』(소담출판사, 2005)
  • 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http://www.baehofan.com/)
  • 위키백과(http://ko.wikipedia.org)
  • 인터뷰(배호를 기념하는 전국모임 회원, 한태섭, 2011. 5. 4)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3.11 인천연안부두 노래비 건립일 수정 2011년 4월->2011년 10월 8일
2016.09.20 본명과 활동 사항 수정 본명과 호적상 이름, 활동 사항의 연도를 수정함
이용자 의견
아** 제가 대전에 살 때 중학교 1학년 쯤인 1971년 11월 대전 동구 원동 근처 헌책방에서 당시 흑백 TV에서 배호가 사망했다는 뉴스와 함께 장례식에 참석한 하춘화(당시 19세 정도?)가 슬피 우는 장면이 영상에 나와 인상에 오래 남았는데 무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2019.11.16
이** 유럽여행가는 밤 비행기에서 영화와 음악을 뒤적이다 배호님의 찔래꽃을 듣게되었습니다,
13시간 지루 한 비행기안에서 트로트풍의 찔래꽃은 색다른 감정이였습니다,20여번을 찔래꽃을 들었을겁니다,
전설적인 가수 배호선생님의 모든것을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2019.10.15
임** 인천연안부두에 노래비는 2011년 10월 8일에 건립되었습니다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하여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9.02.12
강** 동대문구 창신동이 아니라 종로구 창신동입니다. 창신동 쪽에 동대문이 있어 동대문구로 많이들 착각하시죠. 배호 선생님이 창신초등학교 30년 선배님이시네요.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신동의 현재 주소는 '종로구 창신동'이 맞습니다. 다만, 1975년 이전에는 창신동이 동대문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배호의 생애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주소 체계를 기준으로 작성하고, 현재의 주소를 병기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7.12.30
이** 제가 젊어서 길가마다 전파사에서 가신 임의 노래가 나오면
더 이상 발걸음을 내치지 못하고 그의 노래가 끝난 다음에야 길을 갔던
그 시절이 뇌리에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lbd5425 원송 이병두
2016.11.21
이** 본명하고 호적상 이름하고 다른건가요? 본명이 곧 호적상 이름 아닌가요? 본명은 배만금, 즉 호적상에 배만금이요, 배신웅은 아명(兒名)으로 어릴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으로 중학교 교복 명찰에도 배신웅으로 되어있습니다. 1969년이 아니라 1968년이 "내 인생 최고의 해"라고 배호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 답변
  • 디지털양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항목에 대한 검토 후 문의 주신 내용에 따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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