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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465
한자 萬神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집필자 서영각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무녀(巫女)·무당(巫堂)을 높여 부르는 명칭.

[개설]

만신은 한자로는 만신(萬神)으로 쓴다. 남자 무당은 박수(薄數)라고 한다. 개성과 한양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어 예로부터 양주 지역에는 만신이나 박수들이 많았다. 이들은 아들이 없는 집에는 아들을 빌어 주고, 아픈 사람은 낫게 해주는 굿을 펼치며 비명횡사한 원혼(冤魂)은 그 혼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굿을 해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정월에는 재수굿을 하였으며 예전에는 나라의 무사태평을 비는 나라굿도 하였다.

[양주와 만신]

양주시 일원은 예전 한양의 외곽 지역이었으므로 특히 만신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한양을 드나들면서 굿을 하였으므로 주로 한양굿을 하였다. 한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기에 양주시 일대 만신들이 펼치는 굿은 한양의 굿거리와 가장 많이 닮았던 것이다. 양주 일대 만신들의 한양굿은 재수굿 12거리와 그 음악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양주 지역에는 한양굿 외에도 평안도나 황해도의 굿이 함께 전승되었다.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무당들이 많아서 황해도 및 평안도의 소위 ‘이북굿’이 성행한 적이 있다. 이북굿은 춤사위와 사설 및 공수가 빠르고 한양굿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양주소놀이굿에 등장하는 만신은 황해도 만신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그리고 그 계보는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옹안이 만신으로 이어졌으나, 지금은 양주를 대표하는 만신의 계보는 그 명맥이 끊어져 찾을 길이 없다.

양주 일원의 무당굿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1950~196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져가기 시작했고, 지금은 양주시 어디서든 마을굿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적인 환경이 급격하게 변한 데다 굿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마을굿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만신의 탄생]

무당은 특별한 계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림굿에 의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변의 무당이 내림굿을 하여 신 내리게 함으로써 정식으로 무당이 되게 하는 절차를 밟는데, 이렇게 내림굿을 하고 난 뒤에 무당 수업을 받기도 하고 아무런 가르침 없이 홀로 무업을 익혀 무당의 길을 가는 이들도 많았다. 신이 내린 무당들이 섬기는 신은 최영 장군 산신할아버지, 부처, 관세음보살, 약사보살, 산신령, 미륵, 산신도사, 장군신, 동녀신(童女神) 등 다양하다. 내림굿을 해주면 그 무당과 새로 신이 내린 사람 사이에는 어머니와 신딸의 관계가 형성된다.

무당들은 서로 무리를 이루어 굿을 다니기도 하는데, 이때 필요한 악사[악공]들이 함께 따른다. 예전에는 각 지역마다 점복으로 신통하게 앞날의 일을 맞추거나 굿을 잘하는 만신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들의 예언을 믿었다. 양주시 일대의 이름 있는 만신들은 서로 유대 관계를 갖고 살았다. 그래서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붙여 각기 ‘유양리집네’라는 식으로 서로를 부르곤 하였다.

[양주 감악산 무당]

무당들은 높은 산이나 신령스런 산의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거수(巨樹)나 기암(奇巖)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 양주 지역의 무당들은 주로 감악산을 특별한 산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파주 적성이나 연천군, 양주 일대의 무당들은 감악산 산신에게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

봄가을로 날을 잡아 감악산 산신에게 무업이 번성해지길 빌었으며 자신들의 점술이 신통해지기를 염원하였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게는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빌었고, 집안의 평안과 수명장수 등을 빌기 위해 감악산 정상에 올라 치성을 드리고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무당들에게 감악산 산신은 매우 영험한 신으로 여겨졌으며 이들의 치성으로 감악산 주변에는 많은 수의 굿당들이 있었다. 감악산 산신에게 치성을 드릴 때는 사과·밤·배·감·대추 등 씨가 있는 삼색실과와 고기·술·백설기와 시루떡 등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감악산 빗돌대왕에게 빌었다.

무당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정화수(井華水)를 떠서 별채의 신당에 가져도 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이들의 본업은 점복과 주술, 부적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불안감을 갖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재난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한 미래를 점과 주술적인 행위로 예측하고 현실의 문제를 풀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복, 주술 행위는 무당들이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양주시 일원에 살았던 과거 무당들의 모습도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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