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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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der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종봉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걸쳐 경상남도 양산 지역을 침략한,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 집단.
[개설]
왜구는 1223년(고종 10)에 금주(현 김해시)를 처음 침략하였으며, 1350년(충정왕 2)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이후 1392년(공양왕 4)까지 169년 동안 총 519회나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왜구가 침략할 무렵 고려는 내적으로 무신정권·대몽항쟁으로 정치권력이 불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거란족의 침략과 몽고의 성장 등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일본에서는 남북조의 혼란으로 중앙 통치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여 일기도(壹岐島)·송포도(松浦島)·대마도(對馬島)·평호도(平戶島) 지역의 민들이 쉽게 해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왜구의 침략 목적은 정치적 야심과 문화적 욕구에서 이루어졌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경제적 목적이 중심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상은 미곡이었다. 주된 대상은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과 양곡을 저장한 조창이었다. 특히 곡창 지대인 서해안 일대의 조운선이 많은 습격을 당하였다. 다음으로 왜구의 약탈 대상은 사람이었다.
[내용]
양산 지역에는 공민왕 10년·13년·23년, 우왕 2년·3년·7년 등의 시기에 침략하였는데, 특히 1363년(공민왕 12)에는 200여 호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산군조에 의하면 "홍무 신유년, 즉 우왕 7년(1381) 봄에 양산을 왜적이 침입하여 불을 놓으니, 양산 백성들이 그 땅을 잃고 속현 동평으로 성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양산은 고려 말 전국의 연해 주군과 마찬가지로 왜구의 피해가 심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산은 왜구의 중요 활동 지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있었기 때문에 왜구가 활동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왜구는 양산 지역만을 공격의 목표로 하였을 가능성보다는 인근 지역인 밀성·김해·울주·동래·동평 등의 군현을 함께 침략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양산은 인근의 군현과 비슷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며, 이로 인해 양산 지역은 혼돈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실제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조에 의하면 왜적이 침입하였을 때 박창(朴暢)이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는 것을 보고 왜구도 효성에 감동하여 살해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왜구의 침략으로 무참한 살상을 당했을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