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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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源浦部曲 |
영어의미역 | Communities of Low Caste Laborers, Wonp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종봉 |
[정의]
신라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경상남도 양산시에 설치된 특수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부곡은 전정(토지)이나 호구가 하나의 독립된 고을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었다.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부곡제 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부곡제 지역은 부곡·향·소 등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 고적 등신장조에는 “지금 살펴보건대 신라가 주군을 설치할 때 그 전정과 호구가 현이 되지 못할 만한 것은 향(鄕)을 두고 또 부곡을 설치하여 소재의 읍에 속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포부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양산군 고적조에 범어부곡과 함께 군의 서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산의 읍치는 현재의 양산 시내다. 따라서 원포부곡은 군으로부터 서쪽으로 먼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옛날 원포부곡에는 원포역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
부곡에 거주하는 민(民)에 대해서는 양인설과 천민설이 있다. 부곡에 ‘토성이민’이 거주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천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부곡에 거주하는 민은 양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 즉 강도 높은 수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 군현민과는 구별되었다. 원포부곡에서는 토지를 경작하는 민들이 거주하였으며, 국가에 조·용·조의 세를 부담하였다.
[변천]
부곡은 변천 과정에서 행정구역 내로 편제되었으며,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군현으로 승격되는 경우, 2개 이상의 부곡 또는 촌과 통합하여 새로운 군현으로 승격되는 경우, 주변의 다른 군현에 흡수되어 해당 군현의 촌락으로 되는 경우, 원래의 군현에 있으면서 직촌(直村)으로 되는 경우가 있었다. 양산의 부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범곡부곡이 지금의 석곡촌이라고 기록된 점을 고려할 때 조선초기 또는 그 이전에 직촌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부곡의 소멸은 자연촌의 성장과 밀접히 관련된다. 원포부곡의 소멸은 고려 후기 이후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산력이 증대되고, 이에 따른 자연촌의 성장에 기인한다.